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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Oct 05. 2018

첫 번째 #1

글 쓰듯이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무>를 만들었던 2016년에 이렇게 생각을 했다. '글 쓰듯이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영화를 조금 더 즉흥적으로, 그렇지만 글이 쓰이는 것보다는 훨씬 느리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었을까? 그러니까 글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이듯이 순서대로, 첫 문장을 쓰고 나서 그다음 문장을 생각하듯이, 영화의 맨 첫 컷을 그 영화의 시작으로 찍고 나서 그다음 컷을 생각하는 방법으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었을까? 그렇다면, 영화의 하나의 컷은 글에서의 하나의 문장에 필적하는가? 그런 주장을 하기 위한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나는 영화를 조금은 더 쉽게, 훌륭한 스태프들과 훌륭한 배우들 그리고 막대한 자본 없이도, 펜과 '나'라는 주어만 있으면 쓰이는 글처럼 카메라와 나만 있어도 영화를 만들 수 있게, 그리고 조금은 더 깊게 생각하며 느리게, 그러니까 1초에 24프레임이나 흐르는 영화의 속도감에 비해서는 훨씬 느리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었으리라.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그것은 영화로 생각하기 위해서 영화를 해야겠다는 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화 언어에 대해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언어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는 무엇을 말하기 위해 말을 하는지,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영화는 어떻게 말을 하는지, 그리고 그 둘 간에 상관관계는 과연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 <나무>는 그것을 위한 영화였다. 글을 쓸 때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동시에 글을 쓰는 것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처럼, 영화를 만들 때 내가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동시에 영화를 만드는 것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민하기 위해서만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 바로 그 생각을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로 하는 것이 내가 영화를 하는 이유이자 목적이 될 것이었다.


 그렇지만 바로 그러기 위해서는 영화는 필히 무언가를 재현해야만 했는데, 나는 바로 '텍스트'라는 것 자체를 재해석해 재현해내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저 문장을 메모지에 써서 카메라에게 보여주기로 했다. 저 문장으로부터 다음 문장들이 따라 나왔으며, 문장뿐만 아니라 조사들까지도 등장하게 되었다. 나는 공원에서 직립해 있는 나무를 보고서 그 나무를 영화의 주인공으로 삼기로 했다. 영화를 통해서 나무는 어떻게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을까? 나무는 영화를 통해서 어떻게 나무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 실제로 글을 쓰고서 그것을 카메라에 보여주자, 글 쓰듯이 영화를 만든다는 말은 '글 쓰듯이'라는 직유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영화는 뭔가를 쓰는 대신에 뭔가를 봄으로써 말하는 것이었다. 특히 텍스트를 그 자신의 대상으로 삼을 때 영화는 재밌어지는데, 왜냐하면 텍스트의 형상뿐만 아니라 그 텍스트의 의미까지도 영화는 이미지로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는 자신이 본 것들이 서로를 은유할 수 있도록, 그러니까 서로가 만나거나 바라보거나 직접 연결되는 대신에 다만 서로를 상상하거나 기억하기만 할 수 있도록 평평한 이미지들의 시공간이었다. <대기실 #3>에서 말한 것처럼 나에게는, 영화는 하나의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지들이고, 이미지가 평평한 것이 아니라 이미지들이 평평한 것이 영화다. 그 이미지들의 연결을 우리는 몽타주라고 부르는데, 그런데 몽타주는 어떤 영화 언어 체계이거나 문법이기 전에, 어떤 이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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