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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Oct 23. 2018

두 번째 #1

하나하나의 장면이 그 자체로 영원히 반복됨으로써만 존재하고 있을 것

 <나무>에서 나무가 그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은 분명 그것이 사람과 닮아 있기 때문이었다. 혹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직립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멈춰서 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뿌리와 가지는 눕히고 있다. 가능하면 넓게 수평으로 펼치려 한다. 하지만 욕심부리지는 않으며 자신의 환경과 조건과 역량에 그칠 줄 안다. 섭섭함을 받아들일 줄 안다. 그럴 용기를 가졌다. 자신이 못 움직이는 만큼 상상할 줄 안다. 가능한 가장 멀리까지 갔다가 되돌아올 줄 안다. 이 모든 덕분에 자신을 바라볼 수 있고 자신을 연장할 수 있다. 자신을 연장함으로써 바라보고 또 바라봄으로써 연장하는 방법이 나무가 자신을 바라보는 방법이다. 시간을 살아낼 수 있는 모든 존재는 사실 영화적 존재이다. 그리고 영화적 존재는 자신을 서로 다른 영원회귀적 정지-순간들로 분리해내면서 시간과 움직임을 작동시킨다. 그런데 사실 시간이란 그러한 영원회귀적 정지-순간들이 서로를 은유하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이 그들이 존재하는 방법이다.


 나는 그러한 영원회귀적 정지-순간에 철저히 갇혀있을 수 있는, 사람이 주인공인 영화를 상상하려 했다. 하지만 그전에, 스스로 정한 새 영화의 제한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배우 한 명만이 등장하고, 단편이어야 하며, 제작비가 최소화되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이것을 스스로에게 정한 이유는 당연히 저러한 조건들에 부합하는 영화여야만 내가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경제적인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저렇게 확실한 조건들이 생기니 많은 것들을 포기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시나리오는 금방 쓸 수 있었다. 여자가 침대에서 누워 자고 있다가 깨어나는 모습이 부감으로 보인다. 거실로 나왔지만 집에는 엄마와 언니 모두 없다. 똥을 쌌는데 물이 내려가지 않고, 다른 수도에서도 물이 나오지 않는다. 냉장고는 텅 비어있고, 엄마와 언니 모두 전화를 받지 않는다. 집을 아무리 뒤져도 아무도 없고 아무 먹을 것도 없다. 화장실을 다시 가서 변기 물을 내리려 레버를 마구 눌렀더니, 갑자기 변기가 넘치며 똥물이 역류한다. <개똥벌레> 노래가 나오고, 개똥벌레 코스프레를 어설프게 한 주인공이 립싱크를 하다가 노래가 끝나면서 방을 기어 나간다. 밤이 되었고, 거실에서 여자는 엄마와 언니를 계속 부르고 있고, 여전히 전화는 아무도 받지 않으며 텔레비전 또한 신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여자는 어두운 방바닥에 앉아 있다가, 천장에서 불빛을 발견한다. 불을 켜자 반딧불이, 즉 개똥벌레가 천장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여자는 침대 위로 올라서서 벌레를 손으로 잡고,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 먹어버린다.


 나의 개인적 여건이 이 영화로 하여금 주인공이 마주할 수 있는 다른 인물들과 다른 사물들을 최대한 배제하도록 했고, 나는 이 우울한 폐쇄적 감정을 최대한 주인공에게도 적용하려 했으며 다른 무엇보다 주인공이 자신의 감정을 마주할 수 있길 바랬다. 이 주인공이 아무하고도 만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고 또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는 현실을 마주하는 것이 그러한 감정이 존재하는 방법이었다. 감정이 범람하면 노래가 흐르고 그 노래에 맞춰 립싱크와 율동을 하는 것은 또 다른 존재 방법이었고 또 다른 차원의 존재였다. 벌레를 먹는 것이 여자가 자신을 마주하는 방법이었고 맨 처음 누워있는 상태로부터 직립하여 천장을 쳐다보기 위한 방법이었다.

 나는 하나하나의 장면이 그 자체로 영원히 반복됨으로써만 존재하고 있을 것처럼 느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장면을 선택하려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의 영화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돌아오며 스스로를 바라보고 스스로를 재현해내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왜 이 영화의 감정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었을까? 그러니까, 이 영화의 주인공이 바로 이 여자라면, 이 여자에게 그 감정은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이었을까? 그것을 묻는다면 그건 이 영화에게 가장 어려운 질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영화가 아주 멀리까지 갔어야만 되돌아올 수 있었을 지점에서 가능한 질문이고, 또 영화가 이 주인공을 그리고 이 주인공이 영화를 질문의 대상으로 삼을 때에만 가능했을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 두 부분에서 이 영화는 부족했다고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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