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형식 Nov 05. 2018

두 번째 #2

감정이 존재하는 방법, 우리가 다른 감정으로 넘어가기 위한 조건

 2016년에 영화 작업을 하기 위해서 캠코더를 샀다. <나무>의 첫 텍스트-컷에 나오는 대로, "글 쓰듯이 영화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나무>를 만든 후, 안타깝게도 한동안 나는 그 영화의 영향에서 멀어져 있었던 것 같다. 작업을 계속 이어나가지 않았고, 캠코더는 딱히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영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선, 머리로 구상을 하고서 글로 정리를 한 후, 카메라로 무언가를 촬영한 후, 컴퓨터로 편집을 해야만 하지만, 가장 어려운 것은 무엇보다 동기를 얻기였다. 그 부분은 굉장히 영화적 실존의 문제였다. 나는 왜 영화를 해야 하는가? 나는 왜 영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무엇을 촬영해야 하는가. 미리 말해두지만, <나, 개똥벌레>는 이런 질문들에 해답을 주거나 해답의 실마리를 주는 영화는 되지 못했다. 그보다는 이러한 질문들을 뒤늦게 깨닫게 만들게 해 준 값진 실패라고 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카메라를 산 다음 해에, 배우인 연인과 함께 "같이 뭐든지 해보자"라고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해보기 전에는 우리가 뭘 하게 될지 알 길이 없었다. "뭐든지 해보자" 라는 말에는 "우리 둘이서 뭘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둘 모두 제작비로 쓸 돈이 충분한 사람들도 아니었고, 제작비를 마련할 여유도 없었으므로, 그리고 이것은 그저 둘이 같이 하는 첫 작업이었으므로, 나는 저 질문을 조금 바꿔보기로 했다. "우리 둘이서만 뭘 할 수 있을까?" 나는 장소가 한정되고, 등장인물이 한 명뿐인 시나리오를 쓰기로 했다. 장소는 집으로 한정되었고, 주인공은 잠에서 깨어나 보니 철저히 혼자가 된 상태라는 설정을 하게 됐다.

 스스로 한정한 조건들 때문에 많은 부분들을 포기해야 했다. 영화에는 담기지 않은 내용이지만, 주인공 유림은 연극을 하는 배우이지만 대학 졸업 후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하는 배우는 아니었다. 최근에는 오랫동안 했던 알바를 그만두었는데 그렇다고 다른 할 것이 생긴 것도 아니어서 매일 늦잠을 자는 생활을 반복했다. 연극이나 영화 오디션을 지원하려고는 하지만 자기만의 기준에 부합하는 작품들이 많지 않고 있다고 해도 기회가 오지는 않는다. 엄마와 언니는 경제활동을 위해 낮에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고, 그렇게 집에서 혼자 잠에서 깨어나면, 조금은 외롭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좋기도 했다. 전날, 유림은 대학 친구들을 만나고 왔는데, 각자의 길을 찾아서 나름 순조롭게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친구들에 비해 무기력하고 특별한 열정이 없어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자신의 생활 패턴에 변화를 주고 싶어 하지만, 그러한 바람도 반복될 뿐이다. 유림은 이런 패턴이 평생 영원히 반복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오늘도 늦게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캐릭터의 배경 이야기를, 영화에는 그대로 담지 못하더라도, 어렴풋이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어느 하루 동안의 유림의 행동과 감정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 말을 이렇게 달리 말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을 유림이 겪는 감정, 집에서 깨어났는데 혼자일 때의 조금 신나고도 많이 외로운 감정, 유림과 같은 상황에서 느낄 수 있는 죄책감, 무기력을 유림은 어떻게 마주할 수 있을까? 나는 <개똥벌레>라는 노래를 사용하기로 했고, 립싱크 뮤지컬 장면을 넣기로 했다. 먹을 것을 찾고, 엄마와 언니를 찾는 유림의 반복되는 행동의 끝에 갑작스럽게 뭔가가 범람을 하면, <개똥벌레> 노래를 립싱크로 부르는 개똥벌레-유림이 등장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면, 유림은 이 전부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개똥벌레를 발견하고 그것을 먹어버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 영화 속 하루가 바로 여기, 이때에서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유림이 진정 자신의 무기력한 나날을 극복하느냐 마느냐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상관없는 일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병렬되는 것들은 스스로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그것이 감정이 존재하는 방법이고 우리가 다른 감정으로 넘어가기 위한 조건일 것이다.

 스스로 나쁘지 않은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다만 텍스트-컷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후회가 된다. "나는 개똥벌레. 어쩔 수 없네."

매거진의 이전글 두 번째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