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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Nov 23. 2018

세 번째 #1

이미 알고 있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배우들>을 완성한 지 몇 개월이 지나고, 나는 내 영화들에 대해서, 나의 영화 작업에 대해서 스스로 비평하고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영화들에 대한, 그리고 영화 생각으로 보낸 시간에 대한 대화가 스스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영화를 위한 앞으로의 시간들을 위해서 나는 내 뒤를 더듬어야 했다. 아니면, 차라리 나는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뒤로 가야만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텍스트들은 내 영화들을, 그리고 영화에 대한 생각들로 보낸 시간들을 정의 내리기 위한 것들이 아니다. 이것은 수많은 가능한 비평들 중 하나일 뿐이며, 그 목적은 대상을 평가하거나 묶어두기 위한 것이 아니고 차라리 나의 비평 연습에 가까운 것이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배우들>이라는 영화를 끝낸 시점에, 나는 자기 비평이 가능한 영화를 상상했다. 자신을 비평함으로써만 앞으로 나아가는 영화, 아니 어쩌면, 그저 뒤로 가는 영화. 나는 이제는 현대 예술 작품의 가장 중요한 조건중 하나가 자기 자신에 대한 비평 능력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려고 할 때 발생하는 시간만이 현대 예술에게 주어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일 것이라고. 따라서 이것은 그러한 영화를 위한 연습으로서의 글쓰기이기도 하지만, 영화에 대한 글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쨌거나 영화로부터 독립적인 또 다른 텍스트가 되어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배우들>에 대한 글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라는 질문은 나한테 꽤 진지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결국 영화와 텍스트 간의 복잡하고도 미묘하며 신비로운 관계가 서로를 닮아 보이게 강제하는 것처럼, 이 글도 이 영화가 어떻게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하지만 최대한 영화에 직접 담기지 않은 이야기들로만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겠다.


 2017년 8월 초, 나는 이미 4개월 정도 전부터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있던 상황이었고, 그렇지만 아직 잔고가 남아있어 계속해서 뭔가를 할 궁리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항상 그래 왔듯이, 나는 먼저 방법을 정해야만 했다. 영화를 만드는 방법을 정하는 것, 가능한 방법들을 스스로 줄이는 것, 내 영화에 장애를 부여하는 것, 그것은 내가 영화를 시작하는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도저히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거나 확신할 수 있을만한 시나리오나 기획안을 써서 다른 영화들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재밌는 영화를 만들어 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영화를 그렇게 만들고 싶어 할,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할 욕구가 솟구칠 자신이 도저히 없기 때문이다. 나는 불확실성에 기대야만 했다. 그런 사실이 스스로 마음에 들기도 했다. 실패를 각오할 용기 또한 불확실성에 기대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내가 무엇을 영화로 어떻게 만들지 몰랐지만 완전히 몰랐다고 할 수도 없었다. 이미 알고 있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글을 쓸 때에도 마지막 문장을 어렴풋이 '기억'해낼 수 있어야만 첫 문장이 쓰이는 것처럼, 영화도 그랬다. 주인공이 있다면 직업이 배우일 것이며, 영화는 배우가 누워서 시작해서 직립하여 위를 바라보며 끝나거나 그 반대일 것이었다. 나는 어떤 드라마의 오디션 공고를 보았고, 내가 알고 있는 연극 배우들에게 어떤 영화를 제안하기로 했다.

 그것은 <킹덤>이라는 넷플릭스에서 제작하는 좀비 드라마의 좀비 단역들을 모집하는 공고였다. 오디션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배우들이 좀비 연기를 하는 영상을 보내야만 했는데, 나는 연습실 대관과 연기 영상 촬영을 해주는 조건으로, 그러니까 배우들에게 오디션 지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바로 그 좀비 연기 영상을 촬영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영화 제작을 제안했다. 최초로 제안서를 받은 유림을 포함한 네 명의 배우들 모두 제안을 수락했다. 제안서에는 오디션 공고 첨부와 함께 다음과 같은 구상 및 계획안을 적었었다.




 * 구상

- 유림이 친구들과 좀비연기 셀프 영상을 찍는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의 단역 좀비 연기자 오디션에 지원하기 위해서이다. 좀비라는 것은 살아있는 죽음이고, 좀비 연기를 한다는 것은 죽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 유림과 친구들은 만들어진 영상으로 지원을 한다. 누군가는 떨어지고 누군가는 2차 오디션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모두 떨어질 수도 있다.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붙으면 붙는 대로 그다음 이야기를 진행시킬 수 있다.

- 1안) 각 배우들의 실제 삶을 쫓으며 다큐멘터리처럼 찍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거나, 아니면 2안) 일주일에 한 번 모여 각자의 일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그것들 중 몇몇 장면을 선별하여 촬영을 하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킬 수 있을 것이다. 2안의 경우에는, 예를 들면 자신들이 일주일 동안 한 일들을 얘기하고, 또 하지 못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했다면 어땠을지 궁금한 것들을 상상해보는 시간을 갖고, 그 대화를 토대로 촬영할 장면을 같이 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합의하에 장면들을 촬영할 것이지만, 일단은 내가 기본적으로 관심 있는 것들은 간단히 말하면 이런 것들이다; 나는 어떻게 걷는가, 나는 어떻게 누워있는가, 나는 어떻게 서는가, 나는 어떻게 내려다보고 또 어떻게 올려다보는가 등등.)

- 영화를 좀비 연기를 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만큼, 영화의 기본적인 주제는 어떻게든 지속되고 또 어쩌면 갱신되는 우리의 삶(우리가 반복해서 포기하거나 실패하면서도 계속해나갈 수 있는 이유로서의 갱신되는 삶) 속에서 죽음의 이미지들을 발견하고 수집해나가는 것일 것이다. 동시에 죽음의 이미지라는 거창해 보이고 또 부정적으로 보이는 무엇에 대한 편견과 신비를 깨뜨리는 것이 목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영화가 어떻게 될지, 언제 끝날 지는 현재로썬 알 수 없다. 목표는 일단 시작하는 것이고, 또 끝을 위한 마지막 장면을 상상해내고 또 그 장면에 대해 준비해 나아가는 것이 될 것이다.

- 다시 말하지만, 좀비 연기 오디션은 영화의 시작점으로서만 작용할 뿐이고, 그것을 위해 촬영하는 배우들의 연기만이 중요할 뿐이지, 오디션 합격 여부는 영화에서 하나도 중요한 점이 아니다. 그것에 상관없이 혹은 조금은 상관된 채 계속 진행되는 각 배우의 삶에 집중하고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보고자 하는 것이 목표라면 목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예시)

#1. 어느 연습실.

 타이틀이 뜨고, 유림이 자신의 이름과 나이를 소개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화면이 보이면, 유림이 누워있다. 유림의 좀비 연기가 시작된다.

 유림과 친구들은 핸드폰으로 돌아가면서 자신들의 연기를 셀프 촬영하고 있다. 서로 조언도 해주고 수다도 떨고 웃기도 하고 여러 번 연습을 한다. 카메라를 더 멀리 위치시키거나 옮겨가며 여러 번 연기를 돌아가며 한 명씩 하며 촬영한다. 실제 연습을 하고, 인물들의 동선에서의 빈 공간에 알아서 다큐멘터리처럼 촬영을 할 수 있다.


* 계획

- 8월 16일까지 프로필과 셀프 영상을 제출해야 하니, 8월 13일 전까지 셀프 영상 촬영을 끝내야만 한다. 적절한 장소를 하루빨리 구하고 각자 알아서 좀비 연기를 공부 및 연습해 온다. 실제로 제출할 영상은 형식의 카메라로 촬영하고, 14일에 간단한 편집을 마치고 각 배우에게 각자의 영상을 전송하면, 15일에 해당 관계자에 개인적으로 접수할 수 있도록 한다.

- 이후에 참여 배우들과 연출자가 모여 다음 이야기를 어떻게 진행시킬지, 토의하고 진행시키도록 한다.

- 촬영은 기본적으로 형식의 캠코더로 진행을 하며, 이후 상황에 따라서 장비가 추가될 수도 있으나, 이왕이면 현실에 맞춰서 연출의 방향을 정하는 방식으로 장비 사용을 최소화하도록 한다.


* 제작비 관련

- 셀프 영상 촬영을 위한 장소 대여비는 연출자가 제공하고, 그 이후의 촬영에 관해서는 각 배우들의 영화 참여도와 비중에 따라, 상황에 맞춰 협의하여 제작비를 분담하도록 한다. 다큐멘터리를 찍듯 각 배우들의 실제 삶의 장소들에서 촬영이 진행될 것으로 예상됨으로, 큰 금액의 제작비가 소요될 곳은 일단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 참여 배우들이 동의한다면, 출연료를 지급하지 못하는 것을 배우들이 제작비를 투자하는 명목으로, 배우들의 이름이 제작자 크레딧에 올라갈 수 있으며, 영화 완성 후 혹시 발생할 어떤 종류의 수익금이든 제작자 크레딧에 적힌 사람 명 수 n분의 1로 나눠 수익금을 배분하도록 한다.


* 구상 중 2안에 대한 노트

... 어쩌면 그저 근황을 얘기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수 있겠다.

 어디를 갔고, 무엇을 했으며, 날씨는 어땠는지. 

 그러고서 다시 상상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

 자신의 걸음걸이는 어땠을지, 표정은 어땠을지, 거기 말고 다른 곳을 갔으면 어땠을지.

 그래서 다른 식으로 근황을 말하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디를 가지 않았는지,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날씨가 어땠다면 좋았을지. 

 내가 관심 있는 것은 현실이 어떻게 현실을 초월하는가 이다. 순간이 어떻게 순간을 넘어서는가 이다. 실패와 포기가 어떻게 넘쳐흐르는가 이다.

 짐작하는 바로는, 하나의 순간 혹은 기억 혹은 상상이라고 해도 좋을 것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영원히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나무가 항상 그 자리에 있고,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나무가 항상 그 자리에서 예견되기 때문에 그 둘은 자신을 바라보는 나무로서 가능해진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자전거 소리를 따라 나무 주변을 배회할 수 있는 상상 역시 가능해야 한다.

 실패와 포기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우리의 일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있었던 곳에서 항상 반복해서 있기 때문일 것이고 마찬가지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있지 않았던 곳을 우리가 은연중에라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짐작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렇게 말해진 것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믿어서도 안 된다.

 우리가 어떤 영화를 찍는다면 바로 그렇게 우리의 일상이 구성되는 것일 테다.

 그리고 설령 영화가 완성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어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초월되고 다른 표현으로는 갱신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는 항상 새로운 나 이고 즉흥적인 나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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