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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Dec 04. 2018

세 번째 #3

"좀비가 되어 일어나서 걸어라"라고 하는 지문

 나는 처음 유유림 배우에게 그저 단순한 마음으로 좀비 오디션을 제안했다. 좀비 연기를 하는 것이란 굉장히 추상적인 연기를 하는 것이었다. 인물의 직업, 나이, 사는 곳 등을 비롯한 배경과 말버릇, 억양, 습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등의 성격을 고려할 수 없는 연기인 것이다. 제안서에 썼듯이, 좀비란 죽음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한데, 좀비가 주인공이지 않은 이상 대부분의 좀비물에서 좀비는 살아있는 사회적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격과 같은 개별적 특색이 없다. 죽었다는 것이란 개성이 없다는 말일까? 그런데, 대신에 좀비들은 바로 어떻게 죽었는지에 따라서만 좀비 특유의 움직임에 차별성을 부여받는다. 머리가 터져 죽지 않은 이상, 어떤 방식으로도 움직이는 시체가 좀비이기에, 한쪽 다리에 부상을 입은 좀비는 절뚝거릴 것이며, 두 다리가 잘린 좀비는 기어 다닐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예상 가능한 연기밖에 하지 못할 것 같은 좀비라는 특유성은 사실은 배우들이 각자의 성격과 죽음에 대한 관념을 그 자신의 연기에 투사하는 데 있어서 더 많은 자유로움을 허락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좀비가 되어 일어나서 걸어라"라고 하는 지문은 배우에게 단순히 "평소처럼 걸어봐라"라고 하는 지문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 두 지문 모두 그 배우가 움직이는 방식을 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연기는 내 영화에서는 '움직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변하게 될 것이기도 했다.


 나는 처음 유유림 배우에게 그저 단순한 마음으로 좀비 오디션을 제안했다. 배우는 처음에는 해당 오디션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좀비가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 등을 본 적이 별로 없었고 그다지 관심이 없었으며 그런 움직임에 큰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위에서 말한 바와 비슷한 이유로 그러한 연기 혹은 연기 경험이 배우에게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없는 종류의 연기라면 더더욱 그녀에게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배우에게 이 오디션을 보도록 하기 위한 영화 제안이 가능할 지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영화를 위한 괜찮은 방법들을 생각했고, 구체적인 제안을 작성해 보았다. 혼자 연습하기보다는 여럿이서 다 함께 연습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고,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는 영화를 위해서도 여러 명의 생각들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어, 그녀와 같은 극단의 배우들 세 명에게 추가적으로 제안을 했고 모두 제안에 동의하였다. 유유림 배우를 비롯한 네 명의 배우들은 처음으로 좀비 연기를 연구하고 연습하게 되었다.

 오디션 지원 마감을 며칠 앞두고 연습실을 대관하였고 배우들이 다 함께 연습하는 시간을 갖다가 한 명 한 명씩 정해진 시간 내에 촬영을 하기로 했다. 네 명의 배우 모두 좀비 연기를 해본 적이 없었고 연습조차 처음이었다. 네 명은 모두 힘들어하면서도 서로 의논을 해가며 촬영을 했다. 영화의 첫 장면이 유유림 배우의 오디션 지원용 연기 영상으로 시작된다는 것은 미리 정해져 있었지만, 연습실에서의 연습 계획과 연기 영상 촬영 방법만을 배우들에게 미리 정해줬을 뿐 그 외에 특별히 어떤 장면을 연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들의 시간에 개입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물론 나는 사전에 배우들에게 "저는 최대한 개입하지 않는 것이 목표이지만 처음에 어떤 제안을 할 수 있고, 여러분들이 했던 동작이나 행위를 다른 앵글에서 한번 더 찍기 위해 그 동작이나 행위를 한번 더 요구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일러두기는 했지만 영화를 위한 첫 촬영에서는 그저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는지, 그들과의 촬영이 대략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는지 지켜보고 싶었다. 카메라는 그들이 자리 잡을 예정인 위치, 혹은 그들이 자리를 잡았던 위치에 미리 가있거나 뒤늦게 가서 그들의 모습을 담을 생각이었고, 배우들이 한 번 연기를 하고 핸드폰으로 찍은 영상을 보기 위해 자신이 연기한 위치에서의 맞은편으로 매번 이동하였기에 그들이 연기를 마친 후에는 자연스럽게 카메라는 배우가 연기를 시작한 곳에 '대신' 자리를 잡고서 맞은편에서 자신들의 좀비 연기를 '다시' 보는 배우들을 촬영할 수 있었다.

 첫 촬영 후, 나는 앞으로 있을 촬영들의 매 상황마다 모든 여건들이 달라질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얼마나 많이 찍을 수 있는가, 얼마나 많이 공간을 점유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얼마나 적게 찍을 수 있는가, 얼마나 내가 있을 수 있는 공간을 한정시킬 수 있는가를 위치하고 녹화 버튼을 누르기 전에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얼마나 지나가는 순간들을 버릴 수 있는가." 그들의 실제 삶을 토대로 다큐멘터리를 찍듯이 촬영을 하기 위해서는 나는 어떤 순간들은 놓칠 수밖에 없을 것이었는데, 중요한 것은 얼마나 놓치지 않느냐보다는 얼마나 그 지나가는 순간들을 미련 없이 버릴 수 있는가였다. 미련 없이 버리다, 그때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이 말은 후에 영화에서 어떤 배우에게는 지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건 촬영은 물론이고 편집 완료 때까지 연출자인 나 역시 계속해서 수행해야 하는 지문이기도 했다. 좀비 연기에 노하우가 없었던 배우들은 모두 힘에 겨워하고 스스로 부족함도 많이 느꼈지만 각자의 개성대로 연기를 한 것으로 보였다. 배우들 자신들도 오디션 지원을 위해서는 여러 테이크의 연기 영상들 중 하나만을 남기고 모두 버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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