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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Dec 19. 2018

세 번째 #5

언제나 다시 함으로써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한 번 가능하도록

 첫 회의는 17년 8월 26일 오후 1시에 하기로 했었다. 매 회의마다, 회의 하기 전과 그 후에 나의 계획과 반성을 비롯한 생각들을 적어두기로 했었다. 첫 회의에서 다뤄야 할 내용은 대략 네 가지 정도였다. 첫째로, 첫 장면인 좀비 연기 셀프 촬영 장면 이후의 방향에 대한 토의 및 상상. 둘째로, 첫째에서 합의된 내용에 근거하여 첫 장면 촬영 이후의 각자의 근황 이야기 하기. 셋째로, 두 번째 회의 전까지 예상되는 자신의 일정 및 일상 이야기 하기.


 8월 24일, 나는 이런 메모를 했다. "집중한다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집중한다는 것은 마냥 좋은 것일까?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은 반드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 될 것인가? 명상한다는 것은 집중한다는 것인가? 진지해진다는 것일까? 진지함은 언제 필요하고 언제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면 무엇에 집중할 것인가? 무엇에 진지해져야 하나. 무엇이 우릴 진지하게 만드나." 왜 이런 메모를 했는지 그 이유까지 추가로 적지는 않았기에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다만, 이 질문들이 영화가 완성됐을 때 비로소 갖게 될 수 있었던 의미를 참고하자면, 아마도 연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던 중 나왔을 질문이었을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때 당시의 나의 개인적인 고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집중과 명상과 진지함.


 8월 25일, 나는 아마도 제안서를 들여다보며 첫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제작 노트를 인용하고서 그에 대한 기억을 되짚으면서 '아마도' 또는 '~었을 것이다'와 같은 말은 쓰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이 글을 읽는 독자가 내 기억이 정확하지 않으리란 걸 알 것이라는, 그리고 그것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나에게 있어야만 한다. 나는 제안서를 들여다보며 내가 처음 했던 생각들, 처음 했던 상상들을 최대한 유지해보고자 했다. 영화는 배우들이 좀비 연기를 하는 것으로 시작하며, 우리는 1~2주에 한 번씩 모여서 근황을 얘기하며 그 얘기를 "토대로 이미지들을 상상해낸다. 그 이미지들을 각자의 삶의 시공간에서 (다시)연기하며 촬영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이미 봐왔던 영화들 덕분에, 특히 다이렉트 시네마라고 할 수 있는 영화들 덕분에 '삶은 연기된다'는 것을 믿고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다시)'였다. '다시'라는 단어를 괄호 안에 가두는 것이 참으로 야속했지만, 철학책들에서 그러한 것처럼, 가두는 괄호가 사실은 그 단어를 강조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효과를 내는 것이 '다시'라고 하는 단어의 역할이기도 했다. 그것은 언제나 다시 함으로써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한 번 가능하도록 하는 다시이다. 배우들은 이 영화에서 바로 그렇게 연기할 것이며 또 그런 연기만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그리고 제안서에 적었던 죽음의 이미지를 수집한다는 말은, 한동안 "숨겨놓"기로 했다. 어차피 그것은 숨겨지거나 드러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내가 그 당시에 알고 있었는지 그렇지 않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나는 그 전날 고민했었던 '집중하다'라는 동사와 어울리게 할 목적어를 그다음 날에는 "삶에"라고 적었다. 하지만 "이 말의 의미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라고 적은 것을 보아하니, 나는 이 말의 의미도 알지 못했었다. 다만, 나는 앞으로의 회의에서 내가 집중해야 하는 것에 대해 두 가지를 적었다. "그들의 일상에서의 반복."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서의 아주 작은 동작들. 아주 작은 습관들. 아주 작은 몸짓과 아주 작은 감정들. 아주 작은 차이들." 이 두 가지 것들에 집중하는 것에 성공했는지 아닌지는 다음 회의에 대한 제작노트를 다시 들여다봐야만 알 수 있겠다. 그런데 나는 앞으로 쓰게 될 글에서는 제작노트에서  단어들과 문장들을 인용해오고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거나, 그렇게 드러낸 후 그에 대한 기억들이라는 것을 바로 적는 방식의 글쓰기를 아예 지양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다분히 이러한 글쓰기가 바로 그 자신의 대상이기도 한 이 영화를 닮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내가 그저 후회와 앞으로의 다짐만 할 뿐 이미 쓰인 글을 고쳐 쓰지 않으려고 하는 것 또한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려면, 독자가 내가 완성한 지 일 년여가 지난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는 믿음이 나에게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독자의 그러한 믿음을 흔들고 쓸모없게 만드는 것이 나의 목표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 목표의 이유 또한 다분히 이 비평-글쓰기가 이 영화를 닮도록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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