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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Jul 30. 2018

파란입이 달린 얼굴 / 김수정

A Blue Mouthed Face / Kim Soo-Jung

 이 영화를 단지 험난한 정글 같은 세상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친구도 가족도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극심한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한 여자에 대한 영화라고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당연히 이 영화에서 아주 눈에 띄는 사건은 초반부에서 주인공 서영이 병원에 있는 자신의 엄마에게 죽음을 권유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엄마의 병원비를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장면은 이렇게 말로 풀었을 때보다 훨씬 매정해 보이지 않고, 엄마의 실종 소식을 듣는 장면에서도 그녀의 반응은 그만큼 담담해 보이기만 한다. 그것이 서영에게는 그렇게 많은 용기를 요했거나 굳은 결심이 필요했던 사건은 아닌 것 같아 보인다. 그렇지만 정말 그랬을까? 우리가 그것을 알 수는 없지만, 대신 우리는 그런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이 혹은 일으킨다는 것이 서영에게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위함인지에 대해 예감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서영은 누군가의 보호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아하고, 그것을 알아차린 하반신 불구인 서영의 오빠는 새로운 보호자를 찾기 위해 결혼을 서두르려 한다. 나는 서영이 더 이상 누군가의 보호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아한다고 말했는데, 혹자는 그것이 서영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환경이 서영으로 하여금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고 변론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서영의 잘못이냐 아니면 사회의 잘못이냐를 따지자는 데 있지 않고, 사회 전반에 깔린 그런 죄의식을 뚫고 그녀가 도달하고자 하는 그 무엇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기 위함에 있다. 위에서 언급한 엄마에게 죽음을 권유하는 듯한 장면과 병원에서 간호사에게 엄마의 실종 소식을 듣게 되는 장면, 이 두 장면에서 우리가 고작 볼 수 있는 것은 주인공 서영의 뒷모습뿐이다. 여기에 서영의 성격과 그녀의 운명과 반복되는 그녀의 삶의 방식이 담겨 있다. 그녀의 성격은 언제나 뒷모습의 성격이고, 그녀의 표정은 언제나 뒷모습으로써의 표정이다. 사실 그것은 그녀가 우리에게 얼굴을 보일 때조차 진정 그러하다. 영화 내내 계속해서 볼 수 있는 그녀가 우리를 향해 등을 돌린 여러 장면들에서, 우리는 그녀는 좀처럼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는 보이지 않길 바라는 사람일까? 아니면 그녀는 차라리 보이지 않는 존재와 대화하고자 하는 사람일까? 



 서영은 어떤 사람인가? 서영은 한편으론 일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생존하기 위해 일하지만 일 그 자체에 있어서는, 그리고 그보다 타인들과의 사회생활에 있어서는 능숙하지 못하다. 다시 말하자면 그녀는 일하려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급여를 받고자 하는 사람이다. 해고가 될 위기에 처한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그녀는 기계적으로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한편 서영은 기도하는 사람이다. 서영은 정말로 다른 사람들과, 처음 보는 사람은 물론 가족과 대화를 할 때조차 말하는 것이 어색해 보이고, 오히려 기도할 때 아주 자연스러워 보인다. 우리가 서영이 절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볼 때,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 중 제일 잘 하는 것일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신을 마주 보면서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굽혔다가, 바닥에 엎드리는 사람이다. 우리는 그녀가 무엇을 위해 기도를 하는지 알 길이 없지만, 그녀의 이 두 측면을 종합하여 본다면, 그녀의 적성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녀는 동네 작은 상가에 있는 절의 스님, 술과 담배는 물론 주인공 서영과 잠자리도 갖는 스님과 가장 가깝게 지내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스님은 서영이 의지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서영의 롤모델이며, 차라리 서영의 선배이자 전임자이다. 스님의 소개를 통해 새로 취직한 공장의 사장이 내린, 노조 설립 움직임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스님에게서 전달받고, 후에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내는 서영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서영이 스님처럼 어떤 영매, 매개자가 되고자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게 된다. 공장의 사장 그 자신은 그의 모습을 스크린에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신의 모습은 물론 신의 음성 또한 직접 들을 수 없고 매개자를 통해야만 하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그것이 서영이 스님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절대 권력이 아닌 부차 권력을 얻어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비밀이다. 서영과 스님은 절대 권력자에게 대항하려 하지 않고 그에게서 무엇을 쟁취하려 하지도 않는다. 절대 권력자와 소통할 수 있는 자신의 부차 권력의 영역을 영위하고 그럼으로써 생존하는데 만족한다. 보이지 않는 존재와 소통하는 것이 서영이 발견한 생존 방법이다.


 마지막에, 자신이 살던 집을 정리하여 빚을 갚고서 공장 동료들과 함께 탁구를 치던 회사 부설 탁구실로 이사를 온 서영은, 탁구대에 선다. 그리고 맞은편의 누군가와, 보이지 않는 존재와 탁구 랠리를 한다. 누군가를 마주한다는 것은 이 영화 속 인물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이 마지막 장면에서는 쓰일 수 없는 컷이었지만, 불상에서부터 시작해 서영에서 끝나는, 그리고 밥 먹는 서영에서부터 시작해 서영의 오빠에서 끝나는, 긴 시간을 요하는 2번의 180도 패닝샷에는 어떤 꺼림칙하면서도 간절한 애원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 모든 마주 보거나 혹은 마주 보지 않는 장면들에 대한 힌트가 아니었을까? 엄마에게 죽음을 권유하는 장면에서 서영이 엄마와 마주 보지 않고 한 침대 위에서 같은 방향을 보고 앉아 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테고, 오빠가 자신의 죽음을 서영이 보도록 한 것 또한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병원 엘리베이터 앞에서 간호사에게 엄마의 실종 소식을 듣는 장면에서 그들이 나란히 섰다가, 간호사만 엘리베이터에 탄 후 돌아서고, 서영은 벽을 계속 마주하던 장면 또한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또 등을 돌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어두컴컴한 알 수 없는 창고 같은 곳에서 등을 돌려 앉아 노래를 부르던 서영의 모습 또한 기억할 수 있다. 이 모든 각기 조금씩 다른 방향성들은 각기 조금씩 다른 감정들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다시, 마지막에, 서영은 보이지 않는 존재와 마주하고 소통하는데 결국 성공한 것 같아 보이지만, 불안해 보인다. 랠리는 길게 이어지지만 결국은 끝나버리고, 그녀는 굽혔던 허리를 펼 수밖에 없다.


-2016년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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