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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Feb 07. 2019

세 번째 #9

'간접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풍부하게 하는 작업

 좀비 연기 장면 다음에 올 장면으로, 노주연 배우는 외출에서 돌아와 혼자 사는 자신의 집에서 바닥을 닦고 고향에 계신 엄마와 통화하는 장면을, 유유림 배우는 가족들과 같이 사는 집에서 혼자 집과 방을 청소하는 장면을, 고지혜 배우는 매일 그러듯이 그저 아침에 집을 나서는 장면을, 장문영 배우는 늦은 밤 집 앞 공원에서 혼자 핸드폰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귀가하는 장면을 찍기로 했다. 내가 배우들이 각자 혼자 있는 장면으로 두 번째 장면을 시작하려고 한 이유는, 이전에 말했듯이, 혼자 있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혼자 있을 수 없다는 역설이 있었기 때문이었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결국에 내가 이 영화를 스스로가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방법과 계기 혹은 그럴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배우들이 자신의 삶을 연기해봄으로써 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뿐만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삶을 직접 스스로 연기하고 있음을 인식하면서 거기에 약간의 역설과 거짓을 섞음으로써 우리가 사는 시간을 복수화하고 반복되게 하며 천천히 음미할 수 있게 하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혼자 있는 시공간 이외의, 혼자 있을 수 없는 시공간, 그리고 혼자 있는 시공간을 찾기 위하여 겨우 찾아낸 시공간을 인식하기 위해 그것은 두 번째 장면으로서 요구됐다. 우리가 이 영화를 배우들의 일상을 기반으로, 일상을 인용하며 만들려고 했던 것은, 일상 그 자체를 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일상을 연기하며 촬영할 때, 그것을 영화로 찍는다는 사실이 우리의 일상에 끼칠 영향을 기다리기 위해서였기에, 혼자 있는 장면을 찍으려는 우리의 시도가 어떤 영향을 만들어낼지는 기대해볼 만한 것이었던 것이다.

 먼저, 마냥 혼자 있는 장면만 찍을 순 없기에, 그들은 그들의 일상 속 누군가에게 촬영 양해를 구해야만 했다. 어느 장소에서 혹은 어느 사람과의 촬영이 가능한지 여부를 그들이 스스로에게 혹은 그들의 지인들에게 묻는 것은, 그것이 가능하길 바라는 것 이상으로, 그들의 삶에서 촬영이 불가능한 것들의 경계를 알아보는 방법이기도 했으며, 그 불가능함 자체와 그것의 배경에 대해서 생각해볼 기회를 갖는 방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배우들과 나는 촬영의 편의를 위해서 혼자 있는 시공간을 찾아내고자 할 것이었다. 그것은 다른 의미로, 스스로를 혼자 있음의 경계로 내모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한 곳은 우리가 아무도 만난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쉽게 잊을 수 있는 공백의 시공간이기도 하면서 또한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는 혼자만의 행동으로 어떤 생각을, 궁리를, 사고를 하고 있었을 수 있기도 한 시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영화가 어떻게 진행될지 몰랐던 것처럼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몰랐다고 볼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을 봐야만 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우리의 시선이, 배우의 연기가 어떤 바라봄이 되는 시선이, 우리의 삶에 과연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해서도 기다려야 했다. 그렇지만 어떠한 영향이 반드시 있어야만 된다고 목표하거나, 그러한 영향이 우리의 삶을 크게 바꿔야 한다고 목표한 것은 아니었다. 촬영할 장면들의 내용에 대해 나와 배우들 간에 사전 합의를 전제했음에도, 나는 촬영이 시작되더라도 동의하지 않은 상황이 발생한다면 배우들에게 언제든지 문제를 제기하고 촬영을 중단하도록 했다. 대신에 어쩌면 같은 의미에서, 촬영에 대해서 나의 의견에 무조건 따르거나 나의 의견을 무조건 물어보지 않기를 바란다고 일러뒀으며, 그런 의미에서 배우들 스스로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장면을 새롭게 구성하길 바랐고, 어떤 행동과 말을 하든지 그건 모두 배우의 몫임을 강조했다. 다시 말해, 나는 그들이 이 영화를 핑계로 그들의 삶에 어떤 새로움을 추가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도 만약 배우 자신이 그렇게 하지 못하든 아니면 일부러 하지 않든 간에 그 결과를 온전히 책임질 수 있기를 기대하기도 했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 영화가, 영화의 힘을 통해 어떤 삶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하기보다는 그저 그 한계를 확인하는데 그치는 소극적인 목표를 삼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대신에 '소극적'이라는 단어를 '간접적'이라는 단어로 고치는 정도로 더 자세한 답을 미뤄두고 싶다. 그것은 '간접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풍부하게 하는 작업이 이 영화의 목표이자 주제여야만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이 글이 계승해야 할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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