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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Jan 23. 2019

세 번째 #8

망설임은 다시 시작된다.

 그런데 나는 영화의 촬영 종료가 1년여 지난 지금까지도 네 명의 배우들이 각자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이 영화 제작에 임했을지 의문인 상태이다. 물론, 이 질문은 그 자체로 그것의 대답을 미루기 위해 반복되는 질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배우들에게 이 질문을 직접적으로 묻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영화 제작 내내 반복된 질문인데, 하지만 바로 저 글자 그대로, 그러니까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라고 묻는 방식 말고 다른 방식으로 반복된 질문이기 때문이다. 회의 때, 최근 몇 주간 당신들이 했던 생각과 고민들을 들려달라고 한 것도, 어느 날 몇 시에 어느 장소에서 촬영을 할지 일정을 조율한 것도, 그들 앞에서 카메라를 켰던 것도 모두 그 질문을 하는 각기 다른 방법들이었다.

 두 번째 회의에서, 배우들은 자신들에 대하여 내 예상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얘기했다. 한 배우는 가족 중 할머니에 대한 얘기로 시작해서, 집에 대한 얘기로 이어졌다. 집은 그녀에게 휴식의 공간이 아니라고 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가족 혹은 가족 간의 관계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 외의 다른 가족들에게도 비슷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현재의 그녀가 과거의 자신이 한 선택들과 행적들의 결과물인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또 다른 배우는 매체 연기에 대한 어색함과 두려움,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연기를 보여주는 것에 대한 어색함, 부담감에 대해서 말했다. 때로는 연기 연습을 화장실에서 혼자 한다고도 했다. 그러한 부담감에 대해서 고향에 있는 엄마와 통화를 하면, 엄마는 "그것도 못 할 거면 그만 해라"라고 한다고 했다. 세 번째 배우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의 불안감에 대해 얘기했는데, 경제적 문제로 야기되는 불안감에 대해서도 말했고, 그러한 불안감을 무대 위에서 느끼는 다소 과도한 긴장감과 연결시키기도 했다. 가족들과 함께 살기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이 별로 없는데, 그것은 경제적으로 독립적이지 못해서 느끼는 죄책감과 가족들에 대한 부채의식의 배경이거나 혹은 그 반대였던 것 같다. 어릴 적 느꼈던 가난의 아우라를 고백하면서, 그 가난의 트라우마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배우를 해온 것은 연기를 한다는 것이 그저 그녀의 삶의 방식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배우 자체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며, 나이가 들어서도 평생 하고 싶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끝으로 마지막 배우는 친척들과 가족들로부터 받는 못마땅함의 시선에 대해 토로했다. 그 시선의 기준은 아마도 경제적 능력이었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에겔수록 그런 시선의 타격은 더 컸던 것 같은데, 엄마와의 관계는 그만큼 다이내믹해 보이기도 했다. 최근에는 집에서 가족들과 마주치기 싫어 밤늦게까지 집 앞 공원에 있다가 집에 들어간다고 했다.

 네 배우 모두 가족과의 관계와 집이라는 공간, 그리고 연극배우로서의 혹은 개인사적인 경제적 어려움에 대해서 말했다는 것은 공통점이었다. 실질적으로는 두 번째 회의가 영화의 내용을 구성할 얘기를 한 첫 번째 회의였기 때문에, 나는 이들이 처음 얘기한 많은 내용들로 앞으로 만들게 될 영화의 방향성을 탐색해야 했다. 그날 그들이 말했던 내용들은 앞으로의 이야기의 배경들 중 일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하려 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된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날의 얘기들 대부분을 영화 내내 숨기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충분히 발화하지는 못했다. 내가 지금에 와서 망설이는 것은, 그들이 그리고 우리가 진짜로 두 번째 회의에서 한 이야기들만큼의 사적이고 내밀한 것들을 스스로 숨기려 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드러낼 능력이 없었던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과연 숨기기/발화 능력의 부족이라는 이분법의 존재를 내가 확신할 수 있는지, 그 이분법을 내가 인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이다. 나는 배우들에게 집에서의 촬영이 가능한지 물어봤고, 그들 중 혼자 살았던 노주연 배우는 가능했으며, 가족들과 같이 사는 고지혜 배우, 장문영 배우, 유유림 배우 중에는 유유림 배우만 가능했다.


 그 당시 나는 약 5개월 정도 되는 촬영 기간 내내 망설였다. 배우들에게, 카메라가 그들의 집 안으로 들어가야 된다고, 들어가서 그들의 개인적인 역사들을 들추기 위해 그들의 가족들을 비추고 그들의 가족들에게 말을 걸고 인터뷰를 해야 한다고 설득하거나 아니면 압박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들 몰래 그들의 가족들과 접촉할 방법을 찾아서 나 혼자서 인터뷰를 해야 하는지. 그러니까, 영화 제작 결정 초기에 정했던, 회의에서 촬영 내용을 사전 합의한 후 촬영을 하는 방식에서, 바로 그 합의를 조금 더 치열하고 논쟁적으로 했어야 했는지, 아니면 그 합의를 배신했어야 했는지. 결국에는 그걸 망설이는데 촬영 기간을 모두 소요했고, 어쩌면 그걸 망설이기 위해 촬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망설이던 것과 지금 망설이고 있는 것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후자의 것은 '보이지 않는 배우들'의 과제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파라이미지를 위해서'의 과제 중 하나인 것이 분명하지만, 전자의 것은 그때도 지금도 답을 내려야 할 과제는 아닐 것이다. 전자는, '우리는 우리의 무엇을 표현해야 하는가? 무엇이 우리이고 무엇이 우리가 아니며 표현되지 않은 우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꿀만한 것일 테다. 후자는, '우리의 것 중 무엇을 우리가 표현하지 못했을 때, 우리가 고의적으로 숨긴 것이 아니라면 그저 우리의 표현력 부족 때문인 것일까? 그러니까, 정말로 우리는 표현하거나, 표현하지 않거나 아니면 표현하지 못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길게 늘일 수 있을만한 것일 테다. 이렇게 후자의 질문을 길게 늘이면, 어떤 이념적 논쟁의 지점이 드러난다. 즉 그것은, '우리는 표현되는 것과 아직 표현되지 않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우리가 표현하는 그 정도의 존재인가?'라는 질문으로, '표현, 즉 재현은 선재하는 대상이 있는가, 아니면 재현에는 대상이 없으며 재현은 바로 재현될 그 자신을 재현하기 위해 언제나 이미 재현된 그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우리 자신에 대해 표현은 선별적인가, 아니면 우리가 선별한다고 생각하는 그 행동 자체가 표현인가?'라는 질문으로 번역된다. 물론, 두 망설임 중에 그때 하던 망설임에 대해서 내가 "그때도 지금도 답을 내려야 할 과제는 아닐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지금 하는 망설임에 대한 답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난 이 모든 질문들에서 모두 두 번째 선택지를 고를 것이었고 현재도 그럴 것이지만, 다시 내가 망설이고 있다고 했던 지점으로 돌아간다면, 위의 질문들은 모두 어떤 이분법을 강요하는 것에 그칠 수도 있는 위험이 있다. 이러한 이분법은 영화의 후반에서 극복되고자 하는데, 그 이야기는 그만큼 잠시 미뤄둬야 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지금 내가 망설이고 있다고 했던 문제는 이미 결론이 난 것 같기도 하다. 답은 그 숨기기/발화 능력의 부족이라는 이분법을 확신하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것일 테다. 하지만 배우들의 이 영화 촬영에 대한 이야기를 사례로 든다면, 망설임은 다시 시작된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망설임의 영원회귀적 반복이 이 영화의 주된 이야기 자체이기도 하다. 다만, 바로 이 글에서 예견되듯이, 망설임은 표현되지 않으며 대신 이 영화에서 표현은 항상 망설여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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