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형식 Feb 25. 2019

세 번째 #12

<움직이는 사람들>

 네 배우들이 함께 참여했던 공연의 제목은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모두 소속되어 있는 극단 '플레이팩토리 우주공장'의 이슬기 연출 작품이다. 남자 배우 두 명이 더 참여했었지만, 공연 준비 및 연습 과정에서 나는 우리 영화의 주인공들 각각의 단독 샷만을 담을 목적이었기에, 남자 배우들이 영화에 출연할 일은 없었다. 그 외의 프레임 밖 인물에는 무대감독도 있었다. 나는 연극 팀 모두에게, 방해가 되는 순간이 생긴다면 촬영을 중단하겠다는 전제 하에 촬영에 대한 양해를 구했고, 영상에 관련하여 도움이 필요하면 돕기로 했다. 실제로 나는 해당 공연에서 쓰일 비디오 및 오디오를 촬영하거나 편집했다.

 공연 연습 기간은 총 두 달 정도였고,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방문하여 그들의 회의 및 연습 장면을 촬영했다. 그 기간 동안, 배우들의 일상을 가득 채울 것은 연극 연습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한 곳에 모일 기회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연극배우로서의 정체성이 가장 잘 보일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본이 있는 연극처럼 연기 연습으로 채워지는 풍경은 아니었고, 또 그것을 알고 있기도 했다. 내가 <움직이는 사람들>의 연극 연습을 촬영하기로 한 이유는, 그것이 네 배우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는 장면을 담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움직이는 사람들>은 기존의 대본 없이 공동창작의 형태로 제작되는 작품이었다.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연극 구성원들이 기사와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난 후 관련 주제들에 대하여 스터디 또는 회의를 하는 과정을 거쳐서 다 함께 연극의 장면들을 구성하는 것이 그들의 공동창작 방법이었다. 연극은 <권리장전 국가본색>이라는 정치극 페스티벌의 참가작이었으며,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주제로 공연을 했어야 했다. 나는 한편으로는 이러한 연극의 주제가 영화 속에서 그들의 정치성을 변화시키거나 아니면 그들의 정치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할 수도 있겠다는 예상을 했었다. 후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예상이 맞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그들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장면들이 영화 편집을 할 때의 나에게 예상보다 더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으며 결국에는 이 연극의 존재 자체가 이 영화에 중요하면서도 거의 유일하며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럽게 잔잔한 어떤 사건의 계기를 마련해주는 소중한 요소가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해야겠다.


 그들의 개인사적인 이야기 혹은 개인적인 생각들이 영상 서사로서 거의 드러나지 않는, 인물들 각각의 일상 장면들과, 바로 그러한 이야기와 생각들이 당사자의 입으로 직접 말해지는, 연극 회의 장면들은 서로 교대로 반복될 수 있었다. 그 교대는 나한테, 마치 그들이 자신들의 삶에 대한 대본을 스스로 읽는 장면과 그 대본에 대한 추상적 움직임의 연기 장면의 교차 편집처럼 보였다. 영화에 어떤 새로운 계기가 생길 때까지 그 교차를 최대한 반복해야 될 것으로까지 보였다. 하지만 연극 준비는 완성이 되든 파투가 나든 결론이 날 것이었고, 그때까지 영화의 진행 방향에 영향을 끼칠 여러 말들과 장면들을 수집해야 한다는 부담감 또한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부담감을 극복할 뚜렷한 묘책은 없어 보였다. 우리 영화는 어느새, 많은 것들이 새로이 제안되거나 개입될 여지가 없어 보이는, 배우들 각자의 과거와 미래를 조금씩 지연시키는 정도의 변수만이 가능한 아주 조심스러우면서 어느 정도 혼란스러울 수 있는 방식의 다큐멘터리로 굳어졌기에,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기약이 반드시 있을 기다림이었지만, 그것은 시간을 기다리는 기다림이 아니라 시간을 만들어내는 기다림이었다. 존 카사베츠는 배우가 그들이 살고 있는 시간을 운반하는, 표현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지만, 이 영화 속 배우들은 혹은 이 영화 속에서 배우-인간, 배우로서의 인간들은 자신들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제작하는 사람들이었다. 스스로가 믿고자 하는 기억과 생각을 말함으로써 스스로에게 지문을 주고, 그것을 기억하든 잊어버리든 충실히 수행하든 전혀 다른 연기를 해버리든, 움직임을 통해 시간을 만드는 사람들. 물론 영화에서는 이러한 편집 배경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이었다. 그것은 별로 상관없는 두 종류의 씬들의 교차로 보일 것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상관없음의 상관관계가 우리가 그 시간들을 통해 얻은 것들 중 하나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 번째 #1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