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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Mar 12. 2019

세 번째 #13

우리가 믿었던 반복들

 반복은 우리 영화의 최고의 도구이자 최고의 목표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도 했다. 애초에 지난 몇 주 간의 고민들 혹은 일상적 행위들이 반영된 어떤 장면을 촬영하는 것은 그저 배우들의 일상 속에서 어차피 반복되었을 행위를 그렇게 반복한다는 맥락에 속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다가올 몇 주 동안 할 것만 같은 행위들과 고민들을 미리 예측하고 준비해서 바로 그럴듯한 타이밍에 촬영하는 것 또한 반복의 맥락에 속하는 것이었다. (사실은 맥락에 속할 뿐 이 영화는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서사 위에 그것을 촬영한다는 더 큰 맥락의 서사가 덮이는 이야기이다). 배우들마다의 반복되는 장소 혹은 시간들이 있을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러한 비슷한 장소와 시간들 속에서 비슷한 행위들을 하는 것은 영원히 반복될 어떤 리허설과도 같았다. 하나하나의 장면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자면, 나는 가능하면 배우들의 움직임과 동선을 미리 콘티가 짜여 있었던 장면처럼 두 개 이상의 컷들로 서로 이어지도록 촬영하려 했다. 이를테면, 한 앵글로 배우를 촬영하다가, 카메라 위치를 바꾼 후 배우에게 조금 전 행동을 다시 한번만 더 한 다음에 마저 할 일을 마쳐달라는 식이었다. 이럴 때, 배우들은 자신의 일상과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행동을 반드시 두 번 이상은 반복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무수한 리허설과도 같은 크고 작은 반복들은 그렇지만 오히려, 삶을 조금 더 잘, 그러니까 정성스럽게, 진지하게, 어느 정도는 긴장을 갖고, 마치 무대에서의 단 한 번의 연기처럼 살고자 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지만 모순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만한 것이었다. 삶 또한 단 한 번의 연기일 뿐이니까. 그 모순을 유지할 수 있어야지 "언제나 다시 함으로써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한 번 가능하도록 하는 다시"로서의 시간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했던 얘기를 또 하는 것이겠지만, 그건 또한 무언가를 기다리는, 기다리기 위한 반복이기도 했다. 우리 삶에서의 어느 순간, 아니 차라리 어떤 새로운 삶. 어쩌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거나 아니면 차라리 답이 없는 질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질문을 할 때 그 질문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러한 의미의 시간이 될 수는 있을 것이었다.

 돌이켜보니 우리는 애초에 정말로 어떻게 보면 서사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을, 다소 단순해 보이는 움직임만을 포착하고자 한 것 같기도 하다. 거기서 언젠가는 각자의 서사를 발견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그러니까 각 배우들이 이 영화에서 자신들만의 의미를 찾는 것이, 자신들만의 이야기와 주제를 찾는 것이, 영화가 끝나고서 몇 년, 수년이 흐른 뒤에 가능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건 예상이나 예측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각오였다. 그 각오는 다행스럽게도 하나의 방법론을 주야장천 유지하도록 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그 방법론을 역전시킬 수 있는 용기를 줬다. 그러니까, 배우들이 실제로 하지 않은 것들을, 마음속으로 생각만 한 것들을, 계획했었지만 하지 못했던 것들을, 계획하지 않았었지만 이제 계획할 수 있는 것들을 계획하여 촬영하여 기존 방법으로 촬영된 장면들과 섞어도 서로가 서로를 구분해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우리의 역전된 방법을,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하나의 거짓말을, 삶에서의 예기치 못한 변수라고 생각한다면, 하나의 사건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변수와 사건들은 이미 거짓말 없이도 존재해왔기 때문이었다. 진짜 현실이라거나 진짜 삶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고, 영화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이 서로 존재론적으로 배타적이지 않다고, 왜냐하면 그것들 각자 영원히 반복됨으로써만 유일하게 한 번 존재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믿을 수 있을 가능성이 우리가 믿었던 반복들 속에서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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