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형식 Mar 20. 2019

세 번째 #14

이들의 부자연스러운 정체성과 불안한 자존감은 그들의 무대다

 영화를 시작하기로 마음먹기 전 즈음을 되새겨보자. 그때 나는 이 배우들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나? 나는 상당히 그들과 나의 삶의 형태나 구조가 서로 비슷하다고 느꼈다. 참으로 이상하고 부자연스러운 모습 말이다. 그리고 아마 상당수의 한국 예술가들이 이러한 닮은 구석을 공유한다고 보았다. 그 예술가들이란, 자신을 예술가라고 쉽사리 말하지 못하는 예술가들이다. 혹은 그들은 자신을 예술가 지망생이라고 하거나 예술가를 꿈꾸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낮추어 소개한다. 혹은 아예 자신이 누군지 말하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어떠한가. 그들은 이들을 꿈을 좇는, 실패가 예정된, 뒤늦게 정신을 차릴, 열심히 하지는 않으면서 망상만 가득한 젊은이들로 본다. 결국 그들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포기하게 될 것이고 돈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후회할 것이라고 본다. 이 네 명의 배우들에 대해서만 말해보자. 그들이 스스로를 배우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뭔가? 1년에 겨우 한 두 작품의 공연만을 올리기 때문에? 연기를 함으로써 벌어들이는 수익이 거의 없기 때문에? TV 속 연예인들의 미의 기준에 자신이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충분히 열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이 모두 사회문화적인 외부적 규제에 억압당하고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게 아니라 사실은 그들 스스로만의 문제 때문에 드는 생각이라는 것인지 아무도 알 수 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들은 왜 연기 혹은 연극 작업을 계속하는가? 이것 말고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가장 잘하는 게 그나마 이것이라서? 포기가 두려워서? 아니면 아직 뭔가가 더 있다고 믿기 때문에? 아니면 이미 연기를 한다는 것이 자신만의 존재 방식으로 굳어져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들의 일상을 보자. 생활을 하려면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그만큼 연기 활동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연기와 관련된 일을 해보고 그나마 보수가 낫지만 주객이 전도된 것 같은 느낌이 들거나 아니면 그 일도 생각보다 오래 안정적으로 지속되진 못한다. 돈 버는 것을 포기하면 가난해져야 하고 그것은 콤플렉스와 트라우마가 되어 자신을 갉아먹는다. 물론 돈 버는 일을 안 한다고 해서 연기 활동에 그만큼 시간을 많이 쏟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연습이든 작업이든 연기 활동에는 돈이 드니까. 정치적인 면에서 보자. 그들은 스스로를 억압받고 위협받는 여성으로 느끼면서도 그리고 그것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여성들을 동경하면서도 그들처럼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기도 한다. 사회적인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고 믿거나 그렇게 되고자 하지만 언제나 한계를 느끼기도 한다. 그러한 문제들을 기반으로 해야 할 그들의 예술 작업에 있어서 그들은 가장 큰 한계를 느끼기도 한다. 어쨌거나, 그들 자신의 안팎에서 조여 오는 다양한 부족함에 대한 강요적 억압은 결국 그들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위협한다.

 이들의 일상과 삶을 다룬다고 할 때, 그것은 이들 자신을 단순히 표현하고자 한다는 의미가 아니어야 했다. 나는 이 영화 속에서 이들이 자신들의 삶을 구성해나가길 바랐다. 혹은 연기를. 그것이 이 영화가 회의를 통해서 먼저 대본이 쓰이듯이 장면이 정해지고, 혹은 자신의 삶의 부분이 정해지고 그다음에 그것을 연기되는, 혹은 살아지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이유다. 그것이 단순히 표현적이 아니라 구성적인 이유는, 우선 이 영화가 시공간적으로는 그들의 현재 혹은 그들의 실시간적 시점이 아니라 그들의 과거와 미래에만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그들이 있었던 곳 그리고 있을 곳에만 위치하려 했다. 시간적으로는, 그들이 살고 있는 정확한 시간과 장면을 담지 않으려 하고 대신에 그들이 살아왔던 시간과 그들이 살지 않은 시간에 대한 오해와 상상만을 영화화하고자 했다. 조금은 치사하게도, 내가 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말하는 것들은 사실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들이기도 했다. 영화는 결코 인물과 시공간적으로 동일한 위치에 있을 수 없고, 또 시간적으로 결코 완벽히 동일하게 표현 가능하지 않다. 결국 영화는 스스로가 현실과 영화의 구분을, 실제와 상상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영화 속 네 배우들의 연기가 바로 그렇다. 영화 속 그들의 연기는 어쩌면 현실성 혹은 실제성에 대한 패러디이기도 하다. 이들의 부자연스러운 정체성과 불안한 자존감은 그들의 무대다. 그들을 위협하는 외부적 규제들과 그들 스스로 증폭시키는 불안이라는 양 측면에 압도당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가고 있는 경로가 자신들의 의지인지 아니면 오히려 외부 요인이 강제한 결과가 바로 그것인지에 대한 모호함으로 어느새 무장되어 있다. 구성적이라는 말은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는 뜻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그 구성적 방법을 탈자연화시키고 자신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불확실함과 모호함의 불안정성에 차라리 내맡긴다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 번째 #1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