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형식 Apr 13. 2019

세 번째 #15

그들이 정말 존재할까?

 배우들이 준비 중이었던 연극 <움직이는 사람들> 공연 전 약 한 달 간은 이 영화를 위한 회의를 진행하기 어려워 보였다. 연극 연습 장면 외에도 각 배우들의 일상 촬영을 지속하긴 할 것이었지만, 배우들이 연극에만 집중해야만 했던 그 시기가 나는 이 영화 제작에서 반환점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시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 전 마지막 회의에서, 우리가 해왔던 것들을 돌아보고 촬영된 각자의 모습을 돌아보기로 했다. 그것은 또한 앞으로의 방향과 방법에 대한 탐구이기도 했다.


 그때까지 우리는 각자의 일상과 일정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그 일상과 일정이 돌아오는 날에 바로 그것을 수행하는 장면을 촬영하는 방식을 거의 유지하고 있었다. 당연히 거기에는 연극 회의 장면들도 포함된다. 나는 항상 이 방법론을 역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배우들의 일상과 감정과 고민을 다르게 나타낸다면, 왜곡한다면, 실제와 다르게 촬영한다면 어떨까, 라는 것이었다. 곧바로 그 질문은, 실제대로 표현하고자 했지만 본의와 다르게 표현된다면 혹은 지금까지 모두 다르게 표현되어왔던 것이라면 어떨까, 라는 질문을 가능케 했고, 그것은 또 다음과 같은 고민들을 야기하는 것이었다. 정말로 누군가를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 가능할까? 이 영화에 나오는 유림, 지혜, 문영, 주연은 정말로 실제의 유림, 지혜, 문영, 주연일 수 있을까? 실제의 이 네 명의 배우들은 누굴까? 그들을 본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들이 정말 존재할까?

 사실, 이 질문들에 답이 있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진짜 모습이란 없다"라는 것이 될 테다. 그런데, 자신들의 일상을 얘기하는 회의를 통하여 무엇을 촬영할지 결정하고 그것을 촬영한다는 우리의 방법론은 애초에 그러한 답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일상 장면을 굳이 동작을 반복하면서 컷을 나누어 마치 계획되고 짜여진 극영화 속 장면처럼 구성했던 것 또한 그러한 믿음의 효과인 동시에 작용의 배경이기도 했다. 하지만 위의 질문들은 어떤 답을 위한 질문이 아니었으며,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반복되고 또 그래야만 진정 가능할 질문들이었다. 실제적인 것은 우리가 이러한 질문들을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는 것뿐이며, 그것은 '나'의 실제 모습이란 없다는 답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그 답을 직접 증명하는 수행적 질문들이다. 왜냐하면 질문과 고민이야말로 어떤 시간을 마련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시간 안에서야말로 배우들이 어떤 삶을 연기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우들은 이 영화 내내 바로 그러한 고민들을 계속해야만 될 것이었다. 혹은 바로 그러한 고민들 자체를 연기해내는 것이 이 배우들의 역할이었을지도 모른다. 배역/배우, 연기/실제, 가짜/진짜, 무대/삶, 프레임안/프레임밖에 대한 고민으로 바로 그 이분법들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의 연기-삶의 기대 효과였다. 온전히 혼자 있는 장면을 촬영한다라는 모순에 어쩌면 연기라는 것의 신비가 깃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혼자 있는 장면은 사실 더 극영화처럼 구성되도록 반복 촬영하기 쉬웠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하는 장면에서는 카메라의 위치 점유는 물론 반복 촬영도 훨씬 어려웠긴 하지만, 행위를 반복시키는 것과 반복되는 행위들을 발견하고 연결하는 것은 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나한테는 그 모든 일상이라는 장면들을 촬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한편 삶을 굳이 컷 구성된 극영화처럼 보려는 것은 불가능하다기보다는 불필요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영화와 동시에 구성되는 것은 삶이기도 했다. 다가오는 공연 날짜와 공동창작의 어려움에 압박되는 배우들을 촬영하면서, 나에게는 공연이 올라가는 장면이 아닌 공연이 파투나는 장면이 상상됐다. 그것은 그들 또한 은연중에 상상했을 법한 또 하나의 현실이었음에 틀림없었다. 그 장면이 마음에 드는 것은 공연이 정말로 완성이 되든 아니든 그들이 하고 있는 고민에 그 무엇도 큰 영향을 끼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우리는 거짓말을 해보기로 했다. 그것은 현실과 똑같이 평등하고 평평한 어떤 또 하나의 시간을 두거나 아니면 차라리 현실을 더 넓게 평탄화하는 작업이었다. 배우들이 하는 고민들의 무대를 무너뜨리고 넓히는 작업이었다. 관객으로서의 우리들에게 또 하나의, 더 많은 시간을 주자는 것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 번째 #1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