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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아멘타불 Sep 20. 2022

220915

어떤 꿈

 꿈은 이미지의 집합이라고 해서 양날의 검 같은 소재라고 한다. 잘 다루면 환상적, 그렇지 않을 경우 쓰지 않는 것만 못함. 아무래도 대부분은 후자에 속하겠지. 입시를 하는 동안 그 말을 너무 의식했던 걸까? 나는 왠지 꿈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다. 신뢰하지 않는 것을 넘어 부정. 더 정확히는 꿈은 꿈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통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꿈을 많이 꾸는 편이다. 꿈을 많이 꾸면 깊게 잠들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던데. 실제로 수면의 질이 좋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세 시간을 자든 일곱 시간을 자든 열두 시간을 자든 중간에 여러 번 깬다. 다시 잠들면 또 다른 꿈을 꾼다. 내가 모르는 내 안의 세계를 수없이 유영한다. 그건 어쩌면 도피이고 한심한 일 같다. 자고 있는 나를 건드리면 심하게 짜증을 낸다고 한다. 난 기억하지 못하는데. 그걸로 엄마랑 자주 싸웠다. 꼭 방어기제라도 발동한 것 같다. 과연 나는 내 무의식을 신뢰하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 살게 되면서부터 바뀌었다. 요즘은 꿈이야말로 내가 바라는 것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의 나는 썩 잘 살고 있지 않다. 첫 학기는 과제며 시험을 성실히 치르지 않아서 하마터면 국가장학금조차 받지 못할 뻔했다. 지내는 방은 정돈하지 않아 벌레가 기어 나오곤 한다. 귀가하면 눕기 바쁘고, 식사, 공부, 그리고 잠을 모조리 침대에서 해결한다. 독서를 관둔지도 좀 됐다. 작품에 몰입했다가 현실로 돌아오는 감각이 싫어졌다. 분명 싫은데. 내 꿈은 갈수록 선명한 형태가 되어간다. 꿈에서 나는 항상 누군가와 함께다. 다투기도 하고 사랑도 한다. 자주 웃고 또 어떤 것에 간절해하고, 실제의 나보다 더 많은 말을 하는 것 같다. 오래 가진 않는다. 깊게 못 자니까. 깨어나면 아무도 없다. 그게 싫어서 나는 강의를 몇 번 빠졌다.

 기억하고 싶은 것. 어제 꾼 꿈에선 재밌는 소재가 나왔다. 나와 내 친구―꿈속의―가 모종의 사유로 격리되었던 모양이다. 제법 애틋한 관계였는지 격리 사실이 몹시 슬프게 느껴졌다. 친구는 남겨진 나에게 인간 형태의 로봇을 주고 떠났다. 인형? 뭐 그런 거? 외로움을 달래는 정도인 줄 알았는데, 신기하게도 로봇을 통해 친구에게 감각을 전달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친구는 로봇을 통해 나를 보고, 내 목소리를 듣고, 내게 말을 건네고. 또…… 껴안으면 따뜻함을 느끼고, 그런 식.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아주 멀리서부터 뛰어가 그 로봇을 꽉 껴안았다. 뛰었기 때문에 당연히 숨이 찼다. 거친 소리가 났다. 그러나 나는 숨을 고르는 대신 숨소리를 더 크게 냈다. 그 친구에게 내 숨소리가 더 선명히 닿았으면 해서. 그러면 우린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는 기분을 느낄 거라고. 비로소 살아있음을 확신하게 될 거라고. 친구가 좀 웃었다. 나도 웃었다. 안녕. 머지않아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무의식이라 할진대 그런 장면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남는다. 잊어버리면 슬플 것 같았는데, 기억해내서 글을 남기는 지금도 썩 유쾌하지는 않다. 어쨌든 걔는 실존하지 않는다. 또 잠들어도 걔를 만나진 않을 거다.

 나는 그 소재를 어떻게 잘 써봐도 좋을 것 같다고 위안했다. 남의 이야기를 쓰는 게 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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