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김해피 | 원래 너는 아무것도 아니란다.
원래 너는 아무것도 아니란다.
인간이란 존재는 완벽할 수 없음을 두고 머리와 영혼이 서로 인지부조화일 때 이따금씩 이 말을 떠올린다. 그런 줄 알면서도 가끔 스스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일은 내게 또 다른 미성숙으로 다가온다. 살아가는 곳곳에서 마주하는 나의 미성숙함이 가장 크리티컬한 데미지를 입히는 순간은 단연코 직업인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을 때다. 어떻게든 잘 해내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하기에 더욱 치명적인 듯하다. 지금보다 더 어리고 미숙했을 시절 처음 경험한 직업적인 자기혐오는 마음의 시야가 한없이 좁아지는 경험을 안겨주었다. 동료와 나를 비교하거나 어떤 일을 해도 회복 불가능한 무한루프에 빠져 모든 생각의 끝이 '사라지고 싶다'로 귀결되어버리고 마는 일. 그런 일을 다시 겪기에 나는 더 이상 호락호락하지 않은 직업인이 되었고, 여전히 자신의 미숙함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으로부터 한 발 멀어지기 위해 노력한다.
스스로를 못마땅히 여기는 것이 김해피의 미성숙이었다면, 못마땅함을 발판 삼아 딛고 일어나는 힘이 김해피의 성숙이라 말할 수 있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주요 구성품은 ‘인정과 다정함’. 자신에게 불친절한 나를 다시 일어서게 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 그런 자신에게 인정이라는 친절함을 베푸는 것에서 온다는 게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자신에게 친절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안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일에 업무 만족도가 낮아질 때면 이따금씩 불안은 스멀스멀 올라온다. 원하는 대로 쉼을 갖기 어려운 N잡것의 삶이지만 어차피 쉬고 싶다는 마음과는 반대로 뇌가 꺼지지 않기를 바라며 불안과 초조함은 덤으로 얻는다. 나의 경우, 늘 고민하고 생각하고 그걸 또 시각적으로 표현해내거나 실행시키는 일을 해왔기 때문에 뇌가 꺼지면 큰일이 난다(고 생각한다). 번아웃 증후군인가 의심될 때는 ‘나 쉬어야 하나?’ 보다는 종종 아찔한 기분이 들 때가 더 많았다. 쥐고 달리는 것이 많은 이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번아웃 증후군이냐? 미안하지만 지금 그래서는 안 돼, 조금만 더 참아줄래?’ 라며 기어코 재가 되어 날 찾아온 누더기 같은 마음을 어르고 달래며 현실을 부정하기 일쑤인 모습에서 벌써부터 ‘나에게 불친절한 나’의 향기가 짙게 난다.
자신에게 친절하기 위해 마음 둘 곳을 발견하는 것이 첫 번째였다. 김해피의 지인들은 모두 아는 것처럼 나는 40평쯤 되는 텃밭을 가꾼다. 2015년 큰 교통사고 이후 어딘가 찌그러진 내게 밭일을 제안한 건 엄마였다. 긍정과 즐거움으로 빚어진 엄마를 따라 흙을 만지고 그 안의 생장과 죽음에 집중하는 시간은 이제 선택이라기보다는 필수에 가깝다. 잘 키워내고 싶은 욕심과 모자람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의 연속인 그 일이 식물의 성장을 돕는 것과 동시에 나를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욕심과 인정 사이의 밸런스를 맞추어 가다 보면 그것이 곧 일이라든지 삶이라든지 하는 것과 그리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단 1평이라도 온전한 자기만의 방을 꾸리는 것인데, 그곳은 방이기도 명상실이기도 무형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 안에서 불친절한 자아와 친절한 자아가 서로 양보하며 앞날을 도모하게끔 해야한다. 늘 불친절함에 지고마는 것은 습관의 힘이라, 그냥 내버려두면 이내 관성에 의해 중심 잡기가 힘들어지곤 했다. 그럴때면 나는 어김없이 흙을 파고 물을 주고 풀을 뜯으며 다시 중심을 찾았다. 그렇게 40평 밭을 가꾸는 김해피가 다정한 N잡것 김해피로 연결되는 길은 꽤 단순했다. 게다가 욕심과 인정으로 길러진 풍성한 식재료로 요리를 하는 시간은 또 얼마나 귀한지, 스스로 만들어낸 실패와 성공을 직접 맛보고 있자면 일하는 것도 사는 것도 실은 별것 아니라고 다독이게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쉽게 잊히는 마음이다. 어쩌다 찾아온 자괴감으로부터 시작되었을 아득히 괴로운 마음. 직업인으로서의 자기혐오로부터 멀어지는 방법은 지금 바로 자기만의 방을 갖는 것임을 잊지 않기를 바라며, 그 안에서 탄생하는 다정함의 풀을 마음껏 넓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