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해변, 벤치의 비밀
죽을 때, 무엇을 남기고 싶을까?
은행 계좌 잔고도, 명함도, 좋아요 숫자도 저 세상으로 가져갈 순 없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남길 수 있는 건,
살아 있는 누군가가 잠시 멈춰 기댈 수 있는 그 무엇 아닐까?
나는 뉴질랜드에서 늘 걷던 집 앞의 한 해변이 있었다.
사진이 취미였던 나는 항상 그랬듯 카메라를 들고 해변을 따라 걷다 보면
경치가 어딘가 유난히 시리도록 아름다운 지점이 있었고
그곳엔 꼭 벤치가 있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가끔은 벤치에 누워 파도 소리를 들었다.
바람이 유난히 좋던 날엔, 그저 눈을 감고 하늘을 들이마셨다.
밤이 되면 수평선 위로 쏟아지는 별들이 보였고,
어둠 속 바다 위로 떠오르는 분홍빛 달을 보며 한없이 멍하니 있기도 했다.
퇴근 후엔 친구들과 함께 피자 한 판을 들고 벤치에 나란히 앉아 먹곤 했다.
도란도란 나누던 이야기가 잦아들면, 우리는 말없이 눈앞의 풍경을 함께 바라봤다.
그 벤치는 내게 그런 곳이었다.
어떤 날은 하루의 끝이었고, 또 어떤 날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곳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일어나려다, 무심코 벤치 새겨진 작은 금속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In memory of John M. Carter (1953–2017). He loved this view.”
“이 풍경을 사랑했던 그를 기리며.”
순간, 멈췄다.
그 벤치는 단지 벤치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살아 있는 동안 사랑했던 풍경을 다른 누군가도 사랑할 수 있도록 남긴 자리였다.
죽어서 사라지는 대신, 한 조각의 경치를 사람들 곁에 남긴 것이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런 벤치를 ‘Memorial Bench’라고 부른다고 했다.
가족이나 지인이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그가 생전에 아끼던 장소에 벤치를 설치하고
이름과 문장을 새겨 넣는다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그 장소에 앉아 쉬어가며 자연을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의미가 있다고.
나는 그 벤치에 다시 앉았다.
이전에 앉던 것과는 조금 다른 마음으로,
그 사람이 좋아했던 풍경을 나도 지금 이 자리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게 이상하게 따뜻했다.
그건 단지 벤치 하나가 아니었다.
삶의 흔적이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것을 남들과 나누는 방식.
죽은 후에도 누군가의 하루에 조용히 기대어 있는 존재.
나도 언젠가 그런 벤치를 남기고 싶다고 그때 처음 생각했다.
세상의 몇 군데쯤에 내가 사랑했던 풍경을 담은 의자를 놓아두고 싶다고.
누군가 그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고, 그저 잠시 멍하니 자연에 빠져 있을 수 있도록.
그게 내 삶의 흔적이자 다른 누군가의 하루를 받쳐주는 쉼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죽은 뒤에도 누군가의 풍경 속에 조용히 머무를 수 있다면,
그건 나쁘지 않은 퇴장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참 괜찮은 자리를 만들고 갔다고 기꺼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은 죽어서 무엇을 남기고 떠나고 싶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