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같던 워홀, 균열이 시작되다
만약 누군가 내게 이렇게 묻는다면,
“영어, 돈, 경험 중 하나만 가져갈 수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경험"이라고 답한다.
영어는 언젠가 잊힐 수도 있고, 돈은 있다가도 없을 수 있다.
하지만 경험은, 나이가 들어도, 죽기 전에도, 내 안에 살아 있을 테니까.
사람마다 경험의 정의는 다르다.
어떤 사람에겐 여행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겐 해보지 않은 일을 시도해 보는 것일 수도 있다.
또 누군가에게는 다른 나라의 친구들과 눈을 맞대는 일일 수도 있다.
나 역시 워킹홀리데이를 가기 전까지
‘경험’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넓고, 이렇게 깊은 뜻을 가진 줄 몰랐다.
처음 뉴질랜드에 도착했을 때 나는 경험, 영어, 돈.
그 셋을 모두 잡으려 애썼다.
스시 가게에서 일하며 틈틈이 영어 단어를 외우고,
쉬는 날이면 근처 해변이나 공원으로 짧은 여행을 다녔다.
몇 달쯤 지나자 이상한 질문이 마음에 맴돌기 시작했다.
“여기랑 한국이 뭐가 다르지?”
영어는 배우면 배울수록 원어민의 언어와는 달랐고,
일상은 그저 출근-일-퇴근-집의 반복이었다.
물론 나쁘진 않았지만, 뭔가 틀 안에서 돌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쉬는 날은 좋았지만, 항상 집 주변 공원이나 해변을 가는 게 일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그 흐름을 깨고 싶었다.
떠돌이 생활을 하며 자유롭고, 더 거칠게 몸으로 부딪히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여러 나라 친구들을 만나 영어도 자유롭게 쓰고, 돈도 벌고 싶었다.
결국, 다니던 스시 가게를 그만뒀다.
그리고 차를 몰고 타우랑가에서 웰링턴까지 8시간을 달려,
다음 날 아침 페리에 차를 싣고 남섬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솔직히 말하면, 두려웠다.
며칠 전 고속도로에서 시동이 꺼져 큰 사고가 날 뻔했다.
그때 배터리를 교체하긴 했지만, 사실 마음속엔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내 마음속 “죽어도 가고 싶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무식하고 무모했지만,
그 여행은 죽음을 무릅쓴 자유였던 것 같다.
짐을 챙겨 차에 싣고, 아직 어두운 새벽녘에 북섬의 남쪽 끝, 웰링턴을 향해 길을 나섰다.
어떻게든 가고 있었고, 그 와중에 뉴질랜드의 풍경은 정말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만약 자율주행이 있었다면 8시간 내내 풍경만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운전하다 매료되어 사고 날 뻔도 했다.
그 정도로 시시각각 변하는 뉴질랜드의 풍경은 나를 완전히 압도했다.
끝없이 펼쳐지는 초록 들판,
멀리 보이는 설산,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구름,
그리고 그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그 길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감정의 여정이었다.
웰링턴에 도착한 건 해가 진 저녁 무렵이었다.
간단하게 햄버거로 배를 채우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떠나는 페리를 예약했다.
그날 밤은 말 그대로 차에서 자는 밤이었다.
‘차박’이라는 단어도 몰랐던 시절이지만 차에서 자며 여행을 하고 싶었고, 돈도 아끼고 싶었다.
그래서 차 안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뉴질랜드 겨울은 생각보다 훨씬 추웠다.
오들오들 떨며 자다 몇 번을 깼고, 새벽에는 시동을 걸어 히터를 틀었다.
정말, 잠을 잔 게 아니라 밤을 통째로 버틴 느낌이었다.
무모했다. 돌이켜보면 그 순간이 뉴질랜드 밤중에서 가장 길었던 밤으로 기억에 남는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항구에 도착해 차를 페리 안에 주차했고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하루 동안 별의별 경험을 다 한 순간이었다.
시동 꺼질 뻔한 차로 겨우 여기까지 왔고,
밤엔 오들오들 떨며 차에서 자고,
아침엔 페리에 차를 싣고…
힘들기도 했지만, 그때의 나는 경험이 없었고, 어려서 더 짜릿했다.
그리고 페리 안을 둘러보니 동양인은 나밖에 없었다.
그게 이상하게 나를 더 들뜨게 만들었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기분이었다.
이 세계엔 내가 모르는 게 이렇게 많고,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길이 이렇게 넓게 펼쳐져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실감했다.
페리가 출발하고 잠이 쏟아졌다.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 보니 이미 페리는 남섬 근처에 와 있었다.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북섬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나를 압도하는 남섬의 자연. 그리고 그 풍경 속에서 처음 보는 야생 돌고래 무리가
배 주위를 헤엄치며 나를 반겼다.
나는 바로 갑판 위로 뛰어 올라가
영화 ‘타이타닉’의 디카프리오처럼 두 팔을 벌리고 그 순간을 온몸으로 만끽했다.
“경험을 선택하길 잘했어!”
꿈속을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뭐든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두렵지만, 설레고, 익숙하지 않지만, 온몸이 살아 있는 느낌.
그때 처음으로
‘내가 내 인생을 움직이고 있구나’라는 감각을 느꼈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느낄 때쯤,
페리는 조용히 남섬 픽턴 항구에 도착했다.
"당신은 경험, 영어, 돈 이 셋 중 어느 것을 고를 것인가요?"
다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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