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버스에서 시작된 낚시의 추억

마오리 할아버지에게 건네받은 시간

by 석탄

이전 이야기,

https://brunch.co.kr/@nomosophy/13




버스 문이 열리고, 마오리 할아버지가 나왔다.
자연을 오래 마주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편안한 표정을 하고 손을 흔들었다.
할아버지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나는 할아버지의 집을 보며 잠깐 멈칫했지만, 나도 웃으며 손을 들어 인사했다.

‘진짜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신기하면서도, 이상하게 조금 부러웠다.
울타리도 담장도 없이 들판 한가운데 폐버스 안에서, 할아버지는 자연과 함께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살면서 이런 집은 본 적이 없어요. 세상에 하나뿐인 아름다운 집이에요.”

할아버지도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집이야. 편하게 와.”


clay-banks-9i3NkV4mD0k-unsplash.jpg


내가 오기 전까지, 버스 안에서는 낚싯대 손질이 한창이었나 보다.

할아버지는 버스에서 낚싯대 하나를 들고 나오더니 나에게 주었다.
오래 써서 색이 좀 바랬지만, 튼튼한 줄을 새로 감고, 바늘과 추를 달았고,

릴도 기름칠을 한 것처럼 잘 돌아갔다.
지렁이 미끼까지 준비해 놓았다고 했다.

이 낡은 낚싯대가 단순한 도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마오리 할아버지가 오래도록 함께해 온 추억을 나에게 건네는 느낌이었다.

“이거, 이제 네 거야. 한번 해보자.”

그리고 할아버지는 픽업트럭에 올라탔다.
“내 차 따라와.”


나는 낚싯대를 조수석에 싣고, 할아버지의 트럭을 따라 내가 온 길이 아닌, 더 깊은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어디까지 들어가는지 알 수 없어 두렵기도 했지만,

미지의 세계로 향한다는 설렘도 있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도로 중간중간 뉴질랜드 야생 토끼도 뛰어다니고,

나도 할아버지처럼 마치 자연인이 된 것 같았다.


harrison-chang-B4vQ9jRGWGo-unsplash.jpg


할아버지를 따라 한참을 달려 도착한 비포장도로의 끝은 강과 바다가 맞닿는 외딴 해변이었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고 우리 둘이 타고 온 차 두대뿐이었다.
멀리 남섬의 산이 보이는 고요한 해변이었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해서 무섭기도 했다.

그런데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풍경이 아름다웠다.
맑은 하늘, 시원하게 뚫린 눈부신 바다와 멀리 보이는

뉴질랜드 남섬의 푸릇푸릇한 산들이 어우러져 장관이었다.
문명에서 완전히 떨어져 사람 소리, 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바다 위에 떠 있는 배 한 척도 없었다.
마치 다른 행성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fer-nando-8H7KTod_Ge8-unsplash.jpg


할아버지는 집 앞마당같이 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해변 쪽으로 걸어갔다.
나도 낚싯대를 들고 후다닥 할아버지 뒤를 따랐다.

강 쪽으로 오는 잔잔한 파도를 보니, 그 안의 미역처럼 보이는 검은 물체가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헤엄치는 야생 뉴질랜드 물개 두 마리였다.
그 덩치는 상상 이상이었고, 정말 신기했고 눈을 뗄 수 없었다.
나는 완전히 낯선 세계에 들어온 것 같았다.


마오리 할아버지는 그런 장면이 익숙한 듯,

지렁이 미끼를 끼우는 법부터 캐스팅하는 법까지 하나하나 보여줬다.

나는 할아버지를 따라 지렁이 미끼를 다시 끼우고 낚싯대를 들었다.
캐스팅하는 방법도 배우며 몇 번이고 따라 했다.

처음이라 잘 되지 않았고, 날씨는 맑았지만 바다 바람이 거세서 캐스팅이 멀리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 연습했다.


fred-tromp-jhmZVctZmp0-unsplash.jpg


우리는 몇 시간이고 낚싯대를 던지고 또 던졌지만 입질은 오지 않았다.
그래도 이상하게 기분은 좋았다.
바닷소리, 바람 소리, 해가 기울어가는 풍경, 그 안에 내가 잠긴 듯했다.

해가 수평선 가까이 내려올 무렵, 할아버지가 내 옆에 앉아 민망한 듯 조용히 말했다.

“오늘은 잘 안 되네. 그래도 이제 방법은 알았잖아. 앞으로는, 네가 해보는 거야.”


낚시 첫날의 아쉬움과 아름다운 풍경을 뒤로한 채, 우리는 다시 할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 인사를 했다.
“낚시하는 법도 알려주시고, 아름다운 풍경에 낚싯대까지 감사합니다.
제가 조만간 꼭 물고기 한 마리 잡아서 보여드릴게요.”

마오리 할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 뉴질랜드에서 낚시 한번 즐겨봐. 좋은 기억 많이 남을 거야.”


낡았지만, 할아버지가 손질해 준 그 낚싯대를 들고 이제 내가 물고기와 추억을 낚을 차례였다.
할아버지가 준 낚싯대는 그냥 도구가 아니라, 할아버지의 시간과 마음이 담긴 물건 같았다.

그 낚싯대는 나에게 새 물건이지만 이상하게 낯설지 않고, 정이 가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나도, 내 추억을 그 안에 담아 언젠가 누군가에게 다시 선물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날 이후, 홍합공장에서 일을 마치면 곧장
그 낚싯대를 챙겨 또 다른 외딴 해변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다음 이야기 계속..

https://brunch.co.kr/@nomosophy/15



keyword
작가의 이전글70세 마오리 할아버지가 준 쪽지 한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