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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여행 중 만난 현지인, 믿어도 될까?

호수에서 반복되는 낯선 패턴, 하노이

by 석탄

베트남 하노이. 혼자 떠난 여행 중, 호안끼엠 호수에서 처음 현지인을 만났다.


사람과의 교감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버려라?





처음 온 낯선도시에서 가장 솔직한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순간은 언제나 이른 아침이 아닐까?

특히, 베트남 같이 더운 나라는 낮에는 기온이 35도 가까이 올라가고 열기로 달궈진 아스팔트에선 걸음을 옮기기도 힘들다.

습하고 무거운 공기 속에서 현지인도 여행자도 그늘을 찾기 바쁘다.

밤이 되면 도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뒤바뀐다.

유흥과 술자리로 가득 찬 골목, 끊이지 않는 오토바이 경적, 휘황한 불빛 아래 섞여 있는 여행자들과 로컬들.

떠들썩한 하노이의 밤은 생동감 있었지만 어딘가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다.

반면, 아침은 다르다.
소란이 가라앉고 삶이 조용히 드러나는 시간이고 도시가 본래의 색을 드러내는 시간.

현지인들의 삶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가장 생기가 도는 시간이다.

그래서 나는 밤의 번잡함과 유흥보다는 조용한 아침이 훨씬 더 끌렸다.

나는 그 조용한 믿음을 따라 이른 아침 거리를 걷기로 했다.


베트남 하노이의 이른 아침.
호스텔에서 간단한 조식을 마치고 거리로 나서자 습한 듯 선선한 공기와 희미한 쌀국수 냄새를 맡으며 호안끼엠 호수로 향했다.

불과 시간 전의 이곳은 밤거리의 오토바이와 차, 사람 소음으로 가득했지만 전혀 다른 세계처럼 조용했다.

좁은 도로 옆엔 누군가는 냄비에 김을 올리고 누군가는 길거리에 물을 뿌리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 멀지 않아 금방 호안끼엠 호수가 나타났다.



이른 아침부터 하노이의 젊은이들은 목욕탕 의자처럼 생긴 작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노인들은 호수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조용히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태극권을 하는 노년의 손놀림, 나무 아래서 신문을 읽는 중년의 시선, 그리고 간간히 조깅하는 청년들.

생각보다 관광객은 드물고 대부분 현지인들로 북적이는 아침이었다.

호숫가를 따라 걷다 보면 조깅하는 사람들 사이사이 외국인에게 말을 거는 현지인들이 눈에 띄었다.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부러웠다.

이 나라 사람들은 정말 개방적인가 보다.

낯선 이에게 말을 거는 것을 망설이지 않고 언어가 달라도 대화하는 걸 거리낌 없어 보였다.


나는 베트남 이전, 대만에서는 끝내 현지인과 가까워지지 못했다.

잠깐의 인사, 계산을 위한 말 몇 마디가 전부였다.
그래서 이번 베트남에서는 조금 다르게 지내고 싶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고 그들 일상 속 어딘가에 내가 스며들 수 있기를 바랐다.

나는 영어가 능숙하진 않았지만 조식 시간에 몇 번 반복하며 외운 베트남어 몇 문장은 입으로 조용히 익혔다.
그걸로 짧은 대화쯤은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입은 열리지 않았다.
말보다 먼저 멈춘 건 내 용기였다.

생각보다 나라는 사람은 생각보다 낯가림이 심했고 새로운 언어보다 새로운 사람의 시선이 더 두려웠다.

내 마음은 외국인이라는 껍데기를 벗지 못한 채 그들 곁에서 조심스레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그래서 그냥 벤치에 앉기로 했다.
호수 옆 나무 그늘 아래 선선한 아침 공기를 맞으며 말하는 것 대신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푸른 나무들 사이로 흘러가는 바람, 잔잔한 물결을 배경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외국인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현지인들.

호수는 무대였고 사람들은 그 위에서 각자의 삶을 연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무대를 멀찍이서 바라보는 관객처럼 그 풍경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때
“굿모닝.”
낯선 인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한 귀여운 베트남 아이와 엄마가 서 있었다.
조금 전 걸어오며 본 다른 외국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바로 그 모자(母子)였다.

반가웠다.

‘여기서 친구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들이 건넨 인사는 숙소도 식당도 아닌 거리 위에서 처음 마주한 현지의 목소리였다.

그 순간은 내가 원하던 장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우연한 만남이 시작될 것 같은 기대감이 스쳤다.

나는 간단한 인사를 건넸고 그들은 나를 바라보며 수염과 머리를 보고 일본인이냐고 물었다.

호스텔에서 몇 번 들었던 질문이라 익숙하게 웃으며 “아임 코리안”이라고 답했다.

짧은 대화가 이어졌고 암기한 베트남어 몇 마디를 꺼내자 그들은 웃었다.

긴장이 조금 풀리고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 따뜻한 흐름은 오래가지 않았다.
대화는 곧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짧은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아이의 엄마는 내게 아이에게 간단한 영어 질문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묻고 아이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몇 번 내가 웃으며 질문을 하다 보니 이 만남의 목적이 서서히 드러났다.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은 나 혼자만의 것이었고 그들에게 나는 단지 아이의 영어 말하기 연습 상대였다.

내 영어 실력이 기대에 미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챈 순간 그들은 고맙다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곧 또 다른 외국인에게 같은 방식으로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아이와 아버지가 웃으며 다가왔다.

이번에도 같은 방식이었다.

짧은 질문 몇 마디, 형식적인 웃음 그리고 빠른 작별.

그제야 모든 상황의 퍼즐이 맞춰졌지만, 그들의 퍼즐과 나의 퍼즐은 맞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과 상황이 충분히 이해가 가서 그 만남이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아침의 조급했던 설렘이 조용히 식었다.


근처를 둘러보니 호숫가를 걷는 외국인들 얼굴에도 비슷한 표정이 떠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붙잡혔고 이 상황이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어색하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모두가 평화로운 풍경 안에 있었지만 풍경 속에서 무언가 어긋난 듯한 위화감이 이상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분명 아름다웠던 아침인데.. 내 기대 어딘가 작은 금이 간 것처럼 느껴졌다.



그날 오후 나는 호수를 떠나기로 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만에선 두려워 쉽게 다가가지 못했던 현지인들이 살아가는 진짜 거리로.

이번엔 달랐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그곳엔 누군가와 진짜로 연결될 수 있는 순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믿음이 생겼다.

오히려 그런 낯선 곳에서야말로 진짜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골목을 걷던 중 베트남 전통 모자를 쓴 한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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