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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날은 망한 날일까?

겪고 싶지 않지만 다시 겪고 싶은 감정들, 하노이

by 석탄


모든 계획이 틀어졌기에 오히려 또렷이 기억에 남았다.





택시에 탄 나에게 손가락질하며 다른 택시기사들에게 험담하던 내 나이 또래 택시기사.
베트남어는 하나도 몰랐지만 이상하게 그의 분노가 느껴지는 표정과 제스처는 무슨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대만 청년 셋과 함께 탄 택시가 출발하자 나는 그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다시는 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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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택시의 창문을 내리자 통풍이 되지 않던 답답한 마음에 이제는 맑은 공기가 스며들었다.

하노이 밤의 공기가 내 안에 묶여 있던 긴장감을 조금씩 날리는 듯했다.

공항에서 하노이 시티로 가는 거리는 불이 켜진 곳도 드물고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불과 짧은 비행거리였지만 분위기도 사람도 건물도 공기도 겹치는 것이 없는 대만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평온했던 대만과는 달리 이곳엔 왠지 모르게 뭔가 일이 일어날 것 같고 거칠지만 생생한 기운이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나는 뒤를 돌아 장기 여행 중 처음으로 도움을 준 대만 청년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들의 말 한마디, 손길 하나에 혼자인 타국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감정을 느꼈다.

대만에서는 현지인과 대화라고 해봤자 식당이나 편의점 관광지에서 나누는 형식적인 말뿐이었고 현지 친구를 사귄 적도 마음을 나눈 적도 없었다.

그런데 여기 베트남의 한 택시 안에서 공항에서 처음 본 대만 청년들과 웃고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색하면서도 이상하게 따뜻했다.

여기서는 같은 외국인끼리였기에 더 자연스러웠던 걸까.


우리는 호안끼엠 호수 근처에 있는 그 청년들의 숙소에 내리기로 하고 나는 호스텔까지는 걸어가기로 했다.

나는 구글지도를 검색해 보니 호스텔까지 걸어서 5분 정도로 그리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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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웃으며 짧은 영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대만 청년들과 택시비를 정산하기 위해 환전해 둔 돈을 모아 출발 전에 기사에게 들은 금액을 건넸다.

처음 금액을 받고도 문을 열어주지 않고 차 문은 여전히 잠겨있었다.

그런데 기사는 돈을 받자마자 세어보고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또 내밀었다.


“팁! 팁!”


그의 손이 다시 내 앞에 놓였다.

그 중년 택시기사는 공항에서 잠시 도움을 주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결국 그도 나에게 뭔가 대가를 원했던 모양이다.

여기까지 태워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기며 나는 남은 잔돈 조금을 꺼내 건넸다.

그제야 딸각하면서 차 락이 풀렸다.
어딘가 또 당한 기분이었지만 첫날부터 노숙을 면했다는 안도감이 조금은 더 컸다.


대만 청년들과 트렁크에서 각자의 짐을 꺼내고 서로 “여행 즐겁게 잘해. 길에서 또 만나자”며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나는 다시 배낭을 앞뒤로 바로 메고 숙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호스텔까지는 멀지 않았지만 하노이의 밤 골목은 한산했고 불이 켜진 식당도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가로등이 드물게 있는 거리엔 적막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길고 긴 하루였다.

몸도 마음도 지쳤고 어서 눕고 싶은 생각뿐이고 어둡고 낯선 골목이 조심스러워져 걸음은 자연스레 빨라졌다.

숙소에 거의 도착할 때쯤 뒤쪽에서 또 한 차가 천천히 따라오며 "땍씨! 땍씨!"를 외쳤다.

지쳐 웃으며 "노노"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앞뒤로 멘 배낭의 무게보다 정신이 더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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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진 골목 끝에 있는 낡고 오래된 숙소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서니 베트남 특유의 인테리어가 어딘가 이국적이면서 편안하게 느껴졌다.

늦은 시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프런트에 있던 직원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그의 말투와 미소에는 묘한 진심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는 내게 물 한 병을 건네고 내 큰 배낭을 받아 메고는 2층 도미토리 방으로 조용히 안내했다.
오늘 하루 동안 무너졌던 사람에 대한 균형을 다시 맞춰주는 느낌이었다.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만 들리는 방안에 배낭을 내려두고 그는 쉬어라는 손짓을 하고 미소 지으며 나갔다.

나는 침대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방안은 어둡고 조용했지만 침대에 앉아있는 내 머릿속은 떠들썩했다.

길었던 하루가 선명한 꿈처럼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이상하게 모든 장면들이 생생했고 지금 침대에 앉아있는 게 묘하게 짜릿했다.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꽤나 피곤이지만 흥미진진한 날이었다.

모든 것이 틀어졌지만 이상하게 선명한 기억이 머릿속에 박히듯이 남았다.

나를 외면하던 또래 택시기사와 다른 기사들, 구세주처럼 나를 도와준 대만 청년들, 대가로 팁을 바랬던 택시기사, 그리고 따뜻했던 호스텔 직원의 따뜻한 미소.

계획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런 날이 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대만에서의 평온한 며칠보다 오늘 하루처럼 예상과 계획에서 벗어난 순간 감정은 더 진하게 밀려왔고 그만큼 기억도 더 오래 남을 것 같았다.

내가 진짜 여행에서 원했던 건 계획 밖에서 마주친 사람들과 그 감정의 충돌, 예상치 못한 순간이었을까.

그리고 이것이 나를 진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여행으로 이끈 시작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베트남의 첫날밤은 노숙이 아닌 호스텔 도미토리 한 침대에서 끝났다.


다음날 아침, 호안끼엠 호수로 향하는 길.
조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는 또다시 누군가 만나기를 기대했다.

그게 누구든,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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