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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기사들의 집단 승차 거부(2)

장기 여행의 첫 동행 대만 청년들, 하노이

by 석탄


그 한마디가 채찍을 든 채 돌아가며 내 멘탈을 쉼없이 후려쳤다.





"No! Walk!"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어떻게든 오늘은 숙소까지 가야 했다.
구글 지도를 켰다. 택시 기사들이 말한 것처럼 혹시 걸어갈 수 있을까.

공항에서 숙소까지는 30km였다.

30kg짜리 배낭을 메고 그것도 새벽에 6시간 넘게 걸어간다는 건... 정신 나간 짓이었다.


택시 기사들이 나를 태우기 싫어한다면 나는 동행을 구해서 같이 택시를 잡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행을 구해서 간다면 그 택시기사들도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나를 태우지 않을까.

공항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중 일단 한국인처럼 보이는 한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하노이 시티까지 가세요?”

그녀는 하노이 근교 작은 도시에 사는 사람으로 그 지역으로 간다고 정중히 거절했다.
충분히 이해가는 상황이라 오히려 더 절망스러웠다.


그래서 이번엔 대만인들에게 다가가 한 명 한 명 간절하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영어를 못하는 나를 피했을까 이해를 못했을까.

아니면 큰 배낭을 앞뒤로 메고 긴 수염과 머리를 한 내가 돈을 요구하는 사람인 줄 알았을까.

모두들 뒷걸음질쳤다.
그렇게 공항 밖에서 20분간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이제는 공항에 도착하는 비행기도 뜸해졌는지 나오는 승객들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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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대만인같아 보이는 한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그 청년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검은 뿔테 안경에 소심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그의 첫 마디는

“하노이 시티?”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내가 그렇게 원했던 그 단어를 먼저 말하기도 전에 그 청년이 먼저 꺼낸 것이다.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작은 희망을 붙들고 급히 물었다.

“예스! 예스! 유 고 하노이 시티? 택시택시!”

그는 내 짧은 영어를 이해하는 것처럼 대답했다.

“투게더? 쉐어?”

그 청년은 일행이 두 명이 더 있었고 한 자리가 비었다고 흔쾌히 나와 같이 택시를 타겠다고 했다.

여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사람에게 물어서 동행을 구한 순간이었다. 그것도 절망적인 순간에.

나는 대만 청년들에게 택시 기사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들은 괜찮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앞뒤로 멘 배낭의 짐보다 무거웠던 마음의 짐이 그제서야 조금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절망 속에서 내민 그들의 손길은 구세주 같았고 나는 몇 번이고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 셋과 함께 공항 건물 밖으로 나와 다시 나를 비웃던 택시 기사들에게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은 당당하게 다가갔다.
그런데 여전히 나를 유독 싫어하던 그 또래 택시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계속 지켜보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애써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지만 그 시선은 마치 나를 찌르는 것처럼 날카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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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청년들과 같이 나는 그 택시 무리에게 하노이 시티까지 간다고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그 또래 택시기사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대놓고 나를 가르키며 말했다.

“노 디스 맨! 온니 쓰리 피플!”

참았던 분노가 다시 치밀었지만 분노를 터트리면 못탈 것 같아서 내 감정을 꾹 눌렀다.

대만인 세 명도 피곤했고 늦은 새벽이라 빨리 가고 싶었는지 나를 잠시 바라봤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간절한 눈빛으로 같이 가면 안 되겠느냐는 마음을 전했다.

다행히 대만친구들은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잠시 고민하더니 택시 기사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노 디스 맨! 위 돈 고!”


대만 청년들의 그 한 마디에 든든한 내 편이 생긴 것같았다.

하지만 또래 기사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우리에게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Okay! Stay here!”

순간 공기가 싸늘해졌다.
그렇게 한참 또래 기사와 다른 기사들과 실랑이가 이어졌다.

서로 다른 언어로 실랑이를 벌이는 그 사이 주변의 베트남 사람들과 관광객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봤다.

그들을 마주한 나는 이방인이 아니라 어쩌면 문제를 일으킨 사람처럼 느껴졌다.


서서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 택시 기사들의 불만, 대만 청년들과 나의 단호한 태도.

그 모든 게 마치 연극의 장면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안에서 대사를 잃어버린 방황하는 조연 같았다.

이상하게도 그 소란스러움 속에서 마음 한켠에는 묘하고 기분 나쁜 침묵이 흘렀다.


그렇게 실랑이를 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결국 옆에 있던 한 중년의 택시기사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냥 타.”

그제야 굳어 있던 심장이 한 박자 쉬듯 내려앉았다.

'드디어 이 답답한 상황을 벗어나는구나.'

누군가의 마음이 다시 바뀌기 전에 얼른 이 자리를 빠져나가고 싶었다.

탈출. 그게 딱 맞는 단어였다.


드디어 어깨에 메고 있던 무거운 배낭을 내려 택시 트렁크에 실었다.
트렁크 안엔 짐뿐 아니라 억눌린 분노, 피로, 좌절,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작은 용기 하나도 함께 들어 있었다.

짐을 싣는 동안에도 또래기사는 나를 손가락질하며 주변 택시 기사들에게 뭐라 계속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아무 말 없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 날의 택시 조수석은 비행기 비지니스석같이 편안했다. 앉아본 적은 없지만.

창밖의 공항 반대편을 바라보며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아주 길게 내쉬었다.

처음 느껴보는 그 감정이 더럽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이제 숙소로 간다는 상황이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뒤에서 대만 친구들이 나에게 괜찮냐고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말 고맙다고 뒤돌아 악수를 하고 웃었다.

그제서야 내 입가에 편안한 미소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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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택시 앞쪽에서 또래 택시기사는 계속 나를 노려보며 친구들에게 나를 험담을 한듯 손짓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는 못해도 이상하게 충분히 그의 분노와 모든 말을 알아듣고 있었다.

나는 굳이 말하지 않기로 했다. 말로 상처 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택시가 출발하자 나는 대신 그를 향해 조용히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 이후로 내 마음은 조금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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