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아니었던 첫 나라, 대만
나는 길거리에서 새벽을 보낼 용기도 없었고 결국 공항에서 자야 한다는 결론밖에 없었다.
공항 이곳저곳을 한참 헤매다 구석진 벤치 하나를 찾았다.
그 벤치가 내 장기여행의 첫 숙소가 되었다.
대문자 J인 나는 뭔가에 홀린듯 첫날 숙소를 예약하지 않은 채 무작정 떠나와 있었다.
그렇게 공항 한구석, 한 알루미늄 벤치에서 내 여행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떠나고 싶어 했던 여행,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게 맞는 걸까?
인생 첫 노숙의 밤. 장기 여행의 첫 날 밤.
겨우 몇시간이었지만 25년을 살아오며 지나온 수많은 밤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길었다.
'대만의 치안은 좋다던데.. 그래도 혹시 누군가 내 물건을 훔쳐가지 않을까'
눈을 완전히 감지도 귀를 완전히 닫지도 못한 채 불안한 시간을 버텼다.
24시간 가동되는 공항 에어컨의 차가운 공기, 눈을 감아도 뜬 것 같은 밝은 조명, 자지 말라는 듯한 딱딱한 의자.
모든 게 불편했고 그 불편함은 곧 긴장감으로 이어졌다.
나는 제대로 눕지도 못한 채 벤치에 몸을 기대고 몇 초에 한 번씩 깨며 반쯤 감긴 눈으로 졸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점점 많아지고 커지는 캐리어 소리에 잠에 취한 듯 깼다.
더 커지는 소음에 정신을 잠깐 차리고 눈을 떴을 때 눈 앞에는 캐리어를 끌며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떠지지도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려 가장 먼저 배낭 두개부터 확인했다.
다행인지, 당연한건지, 아무도 짐을 손대지 않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시계를 봤다.
새벽 6시.
여행을 떠나기전 며칠전부터 들뜬 마음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오늘은 노숙을 해서 그런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두 눈꺼풀은 천근만근이었고 정신은 몽롱했다.
그래도 일단 제대로 앉아 시티 중심가 쪽 치안도 괜찮아 보이고 후기도 나쁘지 않은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다.
그리고 구글맵을 켜서 시내로 가는 버스를 찾아 탔는데.. 그 이후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실 공항에서 부터 숙소까지는 무슨 정신상태로 온건지, 밖의 풍경은 어땠는지..
나는 아직 몽롱한 상태로 어색하게 배낭을 앞뒤로 메고 숙소에 어찌어찌 도착했다.
숙소 문앞 의자에 앉아 체크인을 할 수 있는지 기다렸지만 한동안 직원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안전한 숙소에 있어서 긴장과 불안이 한꺼번에 풀린 건지, 짐이며 뭐며 신경도 안 쓰고 의자에 그대로 뻗었다.
누구 하나 깨우는 사람도 없었고 직원들은 그냥 조용히 내 곁을 지나쳤다.
나는 체크인 시간인 오후 4시까지 그대로 잠에 빠져버렸다.
그렇게 둘째 날부터는 타이베이 시내 한복판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숙소조차 내 안의 불안과 걱정을 완전히 덮어주진 못했다.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장기여행은 모든 게 낯설고 무엇보다 두려웠다.
편의점에서 물을 사는 일, 식당에서 혼자 주문하는 일, 지하철 노선을 보고 목적지를 찾는 일,
혼자 밤거리를 걷는 일까지 모든 것이.
심지어 관광객이 없는 골목은 애초에 들어가지 않았다.
책에서 읽은 소매치기나 강도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스쳤고 현지인들이 살아가는 진짜 동네는 감히 들어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겁 많은 나에겐 전부 도전이었고 익숙해져야 하는 것들이었다.
그렇게 불안과 걱정과 함께 시작된 장기여행의 첫 나라인 대만에서 보낸 시간은 ‘여행’이라기보다 ‘관광’에 가까웠다.
몸은 낯선 곳에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익숙한 안전지대 안에 머물러 있고 싶어 했다.
네이버에서 미리 찾아본 블로거들의 맛집 리스트, 사람들로 북적이는 유명 관광지를 따라 움직였고 카메라는 늘 보기 좋은 장소만을 향했다.
가끔은 한국 투어 사이트를 통해 만난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낯선 땅에서 한국어가 통한다는 건 그 자체로 달콤한 위로였다.
그리고 투어를 마친 후엔 한국식당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한국의 익숙한 분위기를 나눴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나 혼자가 아니다’라는 착각이 들었다.
말이 통하고 공감이 오가는 사람들 곁에 있다는 안도감.
그게, 당시의 나에게는 절실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즐거웠지만 속은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 만남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들은 짧은 휴가로 대만에 온 사람들이었고 나는 이제 막 한국을 떠난 장기여행자였다.
결국 따뜻한 것 같은 만남은 당일치기로 끝났다.
그건 여행이라기보다는 낯선 땅 위에 잠시 덧씌워진 한국 생활의 연장이었다.
그리고 나는 장기여행을 시작한 후, 가족과 친구들과의 연락은 오히려 더 잦아졌다.
휴대폰 배터리를 항상 걱정했고 와이파이를 찾아다니며 현실과 연결된 끈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내가 있는 곳의 위치를 수시로 확인하고 하루의 동선을 계획하고 정보를 숙지한 뒤에야 움직였다.
파워 J인 나에게 ‘계획 없이 움직인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상에서 벗어나는 모든 상황이 불안했고 그 불안은 계획이라는 껍데기로 간신히 눌러졌다.
낯선 공간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익숙한 방식으로만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대만에서 남은 기억은 블로그에 올라온 맛집들, 사람이 붐비는 명소들, 그리고 점점 커져만 가던 공허함뿐이었다.
나는 그게 단지 '여행이 아닌 관광'에 싫증이 났던 건지 아니면 낯선 것을 피하려는 두려움 많은 나 자신에게 지쳐버린 건지 헷갈렸다.
그렇게 나는 마음을 정리할 새도 없이 무작정 베트남 하노이행 비행기 티켓을 결제했다.
베트남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타이베이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떠나고 싶어 했던 여행,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게 맞는 걸까..?’
‘관광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왜 이렇게 나는 겁쟁이 일까..?'
‘이럴 거면.. 굳이 장기여행일 필요가 있었을까?’
‘그냥 돈 쓰고 싶은 핑계였던 걸까?’
나는 나의 꿈을 의심하면서 조용히 공항으로 갔다.
하노이행 비행기를 타기 전, 나는 미리 검색해 둔 베트남 하노이의 모든 정보를 또다시 정독했다.
베트남 하노이의 관광지, 맛집, 사기 수법, 현지 문화, 성격, 언어까지.
머릿속에 하나하나 입력하며 또다시 계획이라는 보호막 속에 몸을 숨겼다.
베트남.
두 번째 나라는 그렇게 더 익숙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