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만남의 대가는 씁쓸한 거래였다, 하노이
세상은 내가 바라는 교감을 항상 주지 않는다. 때로는 그저 거래만 남을 뿐이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그곳엔 누군가와 진짜로 연결될 수 있는 순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믿음이 생겼다.
오히려 그런 낯선 곳에서야말로 현지 친구를 만들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날 오후, 나는 호안끼엠 호수를 떠나 외국인 관광객들은 잘 가지 않는 뒷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구글지도를 켜고 여행객들을 위한 식당이나 카페가 잘 뜨지 않는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무작정 갔다.
나같이 여행을 온 외국인들이 점점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큰길을 뒤로하고 뒷골목에 들어섰는데 생각보다 너무 조용하고 현지인들도 오토바이도 많이 없었다.
무언가로 꽉 채워지고 복잡하고 소음 가득했던 중심가와는 달랐다.
혼자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베트남 갱단같이 생긴 사람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푸릇푸릇한 화분들이 벽과 바닥을 채우고 오토바이를 세워두고 의자에 앉아 쉬는 노인들, 큰 대야에 야채를 씻는 아주머니, 좁은 골목에서 웃으며 뛰노는 아이들.
외국인인 내가 거기를 걷는 게 신기했는지 골목 안의 사람들도 하나둘 쳐다보았다.
그들과 눈이 마주치면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골목으로 조금 들어왔을 뿐인데 여기선 사람들의 표정도 걸음도 훨씬 느긋해 보였다.
한 골목을 돌면 또 다른 길이 나왔고 길마다 분위기도 집도 사람도 다 달랐다.
점점 더 걸을수록 마치 현지 다큐멘터리 속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그런 현지인들이 살아가는 골목 모습을 보니 내가 그린 어두운 이미지는 자연스레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들의 삶을 가까이서 보는 순간들에 괜히 갱단을 상상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일상적인 풍경이지만 그냥 지나치기엔 아까워 카메라를 꺼내 조심스럽게 셔터를 눌러 그 순간을 담았다.
그저 그들의 일상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득 찼다.
가까이서 바라본 그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은 지금까지의 어느 여행보다도 인상 깊은 오후로 남았다.
나만의 골목투어를 끝내고 큰길로 나와 다시 호안끼엠 호수까지 돌아가기로 했다.
큰길로 들어서자 아스팔트 위 뜨거운 햇살이 얼굴을 감싸며 조금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도로에는 다시 오토바이, 차들로 북적였고 인도에는 현지사람들 사이로 관광객들도 점점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때, 앞에서 과일 바구니가 양쪽에 달린 막대기를 어깨에 맨 한 현지 아주머니가 걸어오고 있었다.
베트남 전통 모자를 쓰고 있었고 그런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녀는 나에게 다가와 웃으며 말을 걸었다.
“프룻?”
바구니 속에 바나나와 여러 과일을 보여주며 사라고 권하는 듯했다.
나는 “쏘리”라며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녀는 웃으며 갑자기 자연스럽게 어깨에 들고 있던 과일바구니 막대를 내 어깨에 얹고 자신이 쓰고 있던 베트남 전통 모자를 내 머리에 씌웠다.
“포토! 메모리!”
그녀는 핸드폰을 달라는 손짓을 했다.
조금 망설였지만 나는 그래도 추억을 남겨주기 위해 친절하게 사진을 찍어준다고 생각하여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건내줬다.
"스마일"이라고 하고 친절하게 내 사진을 두 장 찍어줬다.
나는 순수한 마음에 길거리에서 갑자기 만난 인연이라고 생각해 고맙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내 핸드폰을 돌려주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포토. 투앤띠 달러.”
갑작스러운 돈 요구에 당황스러웠다. 두장에 한화로 이 만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어리둥절했지만 그래도 정중히 거절하자 이번엔 작은 바나나 한 송이를 보여주며 사달라고 요구했다.
작은 바나나 한송이에 한화 만원을 달라고 했다.
금액을 잘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물어보니 정말 바나나 한 송이에 만 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불렀다.
이번에도 내가 거절하자마자 갑자기 근처에 있던 한 중년 아저씨가 다가와 말했다.
“프룻 머니. 포토 머니.”
그리고 첫날 택시 기사에게 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척추를 따라 뒷목으로 스트레스 호르몬이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하는 수 없이 주머니에서 한화로 2천 원 정도의 베트남 돈을 꺼냈고 아주머니는 바구니에서 작은 바나나 두 개를 꺼내주었다.
돈이 작다고 느꼈는지 내 돈을 받고는 그들의 표정은 금세 굳었고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
또 당했다.
나는 그 자리에 바나나를 들고 가만히 서 있었다.
방금 전 골목에서 느꼈던 좋았던 기분이 씁쓸하게 식어갔다.
다시 호수로 걸어가는 길에는 서서히 현지인들과 관광객은 많았졌지만, 이상하게 찝찝했다
왜 세상은 내가 바라는 교감을 항상 주지 않는 걸까? 돈을 건네는 거래만 남은 걸까?
베트남 여행에서는 현지사람을 자연스럽게 만나고 싶은데 계속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물론, 진심으로 교감을 원하고 도움을 주는 사람도 있겠지만, 거래를 원하는 사람이 먼저 말을 건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말을 거는 현지사람들 중 좋은 사람도 있을 거란 생각에 그들을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내 마음은 사람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은 있었다.
하지만 먼저 말을 거는 이들이 늘 거래를 먼저 꺼내는 게 반복되자, 내 마음은 조금씩 사람을 피하고 싶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누군가와 진짜로 연결될 수 있는 순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믿음은 조금씩 흔들렸고 기대는 구겨진 종이처럼 접혀 가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는 길엔 그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잠시 후, 또 한 사람을 만났다.
이번엔, 손에 본드를 들고 있는 청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