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 있는 만남들, 하노이
새로운 환경은 마음을 열게도 하지만, 때로는 닫는 법도 가르쳐준다.
누군가와 진짜로 연결될 수 있는 순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믿음은 조금씩 흔들렸고 기대는 구겨진 종이처럼 접혀 가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는 길엔 그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과일 장수 아주머니와의 씁쓸한 만남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호안끼엠 호수로 향했다.
그녀가 바라는 대로 내가 정말 바나나 한 송이에 만 원을 줬다면 어땠을까?
그 만 원이 그 아주머니의 기분을 마약을 한 것처럼 잠깐 좋아졌을까?
아니면, 길 위의 또 다른 누군가에게 더 많은 요구를 이어가는 시작이 되었을까?
때로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준다는 건 달콤한 독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다치는 일인 것 같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도는 사이 호안끼엠 호수에 거의 다 왔다.
어느새 하노이의 하늘에는 저녁이 깔리고 차, 오토바이, 사람들로 거리가 북적해지기 시작했다.
낮의 뜨겁고 습한 공기는 서늘해지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집밖으로 나오는 것 같았다.
밝았던 호수 위는 아침이랑 다르게 까맣게 번지고, 거리의 음악가들은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불렀다.
리듬을 따라 온몸을 흔드는 아이들도 보였고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저씨도 웃으며 아이들 사이를 걸어갔다.
내 주위에는 야광 장난감을 든 아이들이 모여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어떤 외국인 커플은 작은 플라스틱 컵에 담긴 베트남 아이스티를 나눠 마시고 있었다.
주변 골목에는 형형색색의 등과 간판이 하나둘 켜졌고 노천 식당, 술집마다 여행객과 현지 사람들로 붐볐다.
마치 어느 축제의 한 장면 같았다.
목욕탕 의자같이 생긴 낮은 의자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맥주를 마시고 쌀국수랑 반미를 먹는 사람들로 골목은 가득 찼다.
사람들의 웃는 얼굴을 보니 내 머릿속에 맴돌던 부정적인 생각들도 어느새 사라졌다.
그런데 그 축제 같은 분위기 한가운데서 누가 다급하게 “헤이! 헤이!”하고 외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앞을 보고 걷고 있었는데 뒤쪽에서 점점 부르는 소리가 커져 뒤를 돌아보았다.
"헤이헤이!"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한 베트남 청년이 큰일이라도 난 듯,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피해 빠른 걸음으로 오고 있었다.
그러고는 그는 내게 다가오면서 손가락으로 내 신발 쪽을 가리켰다.
주변 있던 여행객과 현지인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로 쏠렸다.
그 청년은 내 앞에 쪼그려 앉더니 손가락으로 내 신발 뒤꿈치를 가리키며 말을 했다.
“유얼 슈즈! 유얼 슈즈!”
나는 다급한 그의 모습에 놀라 고개를 숙여 신발을 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는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에서 강력접착제처럼 생긴 작은 본드를 꺼내더니 내 신발에 바르려 했다.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순간 발을 뺐다.
“웨잇! 웨잇!”
그는 "히얼! 히얼!"이라고 하며 내 신발 뒤꿈치 쪽에 있는 허공에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내가 신고 있던 건 장기여행을 떠나기 전, 아디다스 매장에서 산 아디다스 새 운동화였다.
심지어 광택까지 살아 있는 거의 새것이었다.
'또 사기인가..?’
하노이에 도착한 지 며칠도 안 됐는데 이상한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서 이번에도 사기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는 계속 내 신발 뒷굽을 가리키며 떨어졌다고 주장했지만 내가 보기엔 그 부분에 그냥 때가 살짝 묻은 것뿐이었다.
아무리 봐도 문제는 없어 보였다.
"나띵.. 웨얼..?"
주변 사람들은 큰 소리로 말하는 그와 당황한 내가 실랑이하는 모습을 지켜봤고 괜히 내가 잘못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문득, 정말로 내 신발을 고쳐주고 싶어서 그런 건지 혹시 내가 괜한 오해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아니면, 단순히 얼마라도 받고 싶은 건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웃으며 그에게 물어봤다.
“프리?”
내 질문에 동공이 커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는 당황했는지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노 프리! 텐달러!”
과일 장수 아주머니처럼 그 청년도 똑같은 금액을 불렀다.
한화로 만원이 넘는 금액.
정신적으로 피로감이 확 몰려왔다.
좋은 마음으로 길에서 친구를 만들어보려 했던 아침의 나 자신이 괜히 순진한 바보처럼 느껴졌다.
이번에도 그 아주머니처럼 그 청년도 날 ‘소리 지르면 돈이 나오는 ATM’처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계속해서 한 손에 본드를 들고 쪼그려 앉은 채, 계속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더 이상 대화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말을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뒤통수 바로 뒤에서 베트남어로 욕 같은 뭔가가 들렸고 그 청년과 그의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후로 베트남 거리에서 누군가 말을 걸면 웬만하면 대답하지 않고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길거리에서는 못 들은 척 지나치는 게 나와 그 사람들 서로에게 좋을 것이란 걸 알게 됐다.
한국에서는 길에서 누가 말을 걸어도 거래를 하려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에 이런 일이 더 낯설고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와 거래하려는 사람들 몇 명 때문에 모든 하노이 사람을 똑같이 보긴 싫었다.
식당이나 카페, 숙소에서 만난 직원들은 언제나 밝고 친절했고 한국인인 내게 관심도 많이 보여줬으니까.
이제 길거리에서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는 만남의 기대는 이미 구겨진 종이처럼 접혔다.
종이는 한번 접으면 흔적이 남듯 내 마음에도 접힌 자국이 남았다.
나는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게 어렵진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길에서 누군가 목적을 가지고 다가오면 상대하는 게 점점 버겁게 느껴질 것 같았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길에서 우연히 베트남 금수저인 친구를 소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