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위의 연극 같은 점심시간, 하노이
“이 모자 70만 원, 티는 100, 신발은 200, 시계는 롤렉스야. 차는 람보르기니 세 대.”
금수저 친구는 SNS에서 본 듯한 사진들을 쉴 새 없이 보여줬다.
람보르기니 핸들 위에 얹힌 롤렉스 그리고 손에 들린 두툼한 돈다발.
뭔가 수상했지만 이상하게도 호기심이 생겼다.
람보르기니, 파티, 롤렉스 다 거짓말 같지만 혹시 사실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한 번쯤은 이런 경험해도 되지 않을까.
람보르기니가 오든 말든, 거짓말이든 아니든, 그다음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게 낭만이든, 실망이든 어쨌든 기억은 남을 테니까.
규칙이 흐려진 곳에서 가장 강력한 보호막은 스스로의 판단력이다.
“오늘 저녁 파티 있어. 내 차도 보여줄게. 6시에 여기서 봐.”
금수저 친구는 그렇게 짧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도 없이 다시 강아지를 안고 사라졌다.
톰도 갑자기 가야 한다면서 마담에게 전통차 세 잔 값을 계산하고 연락처 교환도 없이 떠났다.
그저 순간의 만남으로 여기고 급히 가야 한다는 듯, 뒷모습만 남겼다.
그러고 보니 톰이 셰프로 일한다는 이탈리안 식당이 어디인지도 안 물어봤다.
아침부터 베트남 현지인 두 명과 전통차를 나눠 마시고 나는 묘한 자신감이 생겼다.
왠지 모르게 오늘은 뭔가 해도 될 것 같았다.
저녁 6시 약속까지는 아직 한참 남아 있었고 마침 점심시간이 되었다.
어제까지는 골목을 걷다 배가 고팠어도 현지 식당들은 괜히 위축돼서 그냥 지나치기만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가보고 싶었다.
직접 들어가 현지 음식을 주문하고 나도 현지인들과 함께 앉아보고 싶었다.
네이버에 검색해 보니 하노이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분짜 맛집으로 전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다녀간 식당이었다.
관광객들에게는 명소였지만 그곳까지 가기엔 멀기도 하고 뭔가 오늘의 기분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현지 냄새가 나는 골목으로 발길을 돌렸다.
화려하진 않아도 현지인들이 단골인 식당으로.
'아침에 전통차도 현지인과 마셨으니 점심도 현지인들과 함께!'
내 바람대로 식당들은 허름하지만 베트남 현지 사람들로 북적이는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골목 안은 식당들로 붐볐고 나처럼 이 분위기를 즐기려는 서양 여행자들도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마담카페에서 처럼 인도 위에는 빨간색, 파란색의 플라스틱 목욕탕 의자와 작은 테이블이 빽빽하게 놓여 있었다.
모두가 길 위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점심을 즐기고 있었다.
그 풍경이 어쩐지 정겹게 느껴졌고 나도 어울리고 싶었다.
골목을 둘러보면서 나 역시 눈여겨봤던 한 분짜 식당 앞, 인도에 놓인 빨간 의자에 앉았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허름한 식당이었지만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찼고 그 북적임이 이상하게 믿음을 줬다.
나는 베트남어로만 빼곡히 적힌 메뉴판에서 'Bún chả'라고 쓰여진 단어를 찾아 한 그릇을 주문했다.
‘그래. 오늘은 나도 현지인처럼 살아보자.’
잠시 후, 무심한 듯 차려진 분짜 한 그릇이 나왔다.
주변에선 무슨 말인지 모를 베트남어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나는 그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천천히 젓가락을 들었다.
괜히 조용히 앉아서 이 현지인들의 점심시간에 슬쩍 섞여보는 느낌이 묘하게 짜릿했다.
'오바마도 이런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편하게 분짜를 먹지는 못했겠지.'
나는 베트남의 한 골목, 평범한 점심시간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다.
그렇게 분짜를 몇 입 먹고 있는데 갑자기 가게 안쪽에서 누군가 고함을 질렀다.
직원인지 주인인지 모를 베트남 남자가 소리치자, 근처에 앉아 있던 현지인들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고 의자와 테이블을 안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헤이! 헤이!"
분짜를 먹고 있던 나와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서양인 커플에게도 손짓으로 들어오라고 제스처를 보냈다.
나와 그 커플은 눈치껏 먹던 분짜를 양손에 그릇을 들고 식당 안쪽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하늘이 흐리긴 했지만 비가 오는 것도 아니었다.
'베트남 대통령이 오나?'
'아니면 오바마가 분짜가 먹고 싶어서 다시 왔나?'
밖을 내다보며 두리번거리던 나는 골목 끝, 오토바이 사이로 천천히 다가오는 흰색 승용차 한 대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훈련된 듯 골목 안의 모든 식당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도 위에 놓여 있던 빨간 의자와 낮은 테이블이 순식간에 치워졌고 거리는 거짓말처럼 깨끗해졌다.
방금 전까지 식사를 즐기던 모두가 나처럼 양손에 그릇을 들고 지나가는 도로 위의 한대의 흰 차를 구경했다.
그 차는 마치 이 모든 상황을 아는 듯 느릿하게 골목을 지나갔다.
차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경찰 제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미소를 띄고 있고 차 문짝에 'Police'라고 적혀있었다.
경찰차였다.
경찰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다시 식당 직원들과 사장들이 재빨리 거리로 나왔다.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테이블과 의자를 원래 자리로 다시 내놓았고 나와서 먹으라고 손짓했다.
그 광경이 한편으로는 재미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짜여진 연극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베트남의 거리에는 불법과 합법 사이의 경계가 흐릿하게 느껴졌다.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기면.. 경찰을 믿을 수 있을까?’
'만약, 오늘 밤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어떻게 하지..?'
경찰차가 지나가고 나서 골목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다시 점심을 먹고 식당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점심시간의 활기를 되찾았다.
나는 남은 분짜를 마저 먹으며 방금 본 광경을 곱씹었다.
‘이건 그냥 일상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딘가 마음속이 계속 찝찝했다.
나만 활기를 못 찾은 듯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와 시계를 보니 아직 6시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숙소로 돌아가서 쉬고 다시 나오기엔 애매한 시간이었다.
나는 근처 관광지나 둘러보러 ‘성 요셉 성당’을 가보기로 했다.
그 성당은 하노이에서 꽤 유명한 관광 명소였고 걸어가기에도 그리 멀지도 않았다.
성당 주변은 역시나 관광명소답게 사진을 찍는 여행객과 그들에게 물건을 팔려는 현지 상인들으로 북적였다.
나는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들고 성당 외벽을 배경으로 몇 장을 찍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길거리에서 몇 번 만난 잡상인인가 싶어 얼굴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봤다.
"Yo!"
익숙한 얼굴들.
하노이 공항에서 택시기사들로부터 나를 구해줬던 대만 친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