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유혹과 피어난 의심, 하노이
이전 이야기.
하노이 어느 한 골목, 조심스럽게 다가온 한 베트남 남자 '톰'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게 됐다.
유창한 영어로 자신을 이탈리안 식당의 셰프로 소개한 톰은 베트남 전통차를 마시러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톰을 따라 전통차를 마실 수 있는 '마담'이라는 노포카페에 도착해 현지인들과 전통차를 즐겼다.
그러던 중 톰이 친구를 한 명 소개해주겠다며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캐주얼한 옷을 입은 한 베트남 청년이 작은 흰 강아지를 안고 나타났다.
내 또래처럼 보이는 그는 나를 아래위로 훑으며 자기 몸에 걸치고 있는 명품 이름과 가격을 줄줄이 나열했다.
모자부터 티셔츠, 바지, 신발, 시계, 반지, 목걸이 전부다.
그러고는 “람보르기니 보여줄게. 저녁 6시에 여기서 봐.”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뭔가 수상했지만 이상하게도 호기심이 생겼다.
거짓말이든 아니든, 오늘 저녁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달콤한 유혹일수록 숨겨진 대가를 의심하라.
성 요셉 성당, 하노이.
아직 6시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다.
나는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들고 성당 외벽을 배경으로 몇 장을 찍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길거리에서 몇 번 만난 물건을 팔려는 잡상인인가 싶어 얼굴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봤다.
"Yo!"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며칠 전 하노이 공항에서 승차거부하는 택시기사들한테 휘말릴 뻔한 나를 구해줬던 대만 친구 셋이었다.
이렇게 길거리에서 마주치다니, 우연이라기엔 너무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공항에서 한 번 봤을 뿐인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처럼 반가웠다.
우리는 손바닥을 마주치고 웃으며 가볍게 포옹하며 서로의 여행 상황에 대해서 물었다.
"하노이 여행은 어때? 잘 즐기고 있어?"
“야야, 여기 사진 좀 봐.”
대만친구들은 며칠 동안 사파, 하롱베이, 땀꼭 같은 하노이 근교 투어를 다녀왔다며 사진을 보여줬다.
핸드폰 화면 속에는 초록빛 계단식 논밭, 잔잔하게 물안개 낀 바다, 순박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시골 사람들 모습이 담겨 있었다.
사진과 함께 들려주는 이야기엔, 도시의 소음과는 다른 베트남 시골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내 코끝에는 이미 베트남 시골 속의 구수한 흙냄새와 정겨운 사람냄새가 나는 듯했다.
나도 그동안 하노이 골목을 돌아다니며 찍은 현지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줬다.
서로의 여행을 꺼내놓듯 사진 한 장씩 넘기며 자연스레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러다 문득, 오늘 아침에 만났던 톰과 그 금수저 청년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실, 누군가의 생각이 듣고 싶기도 했고 길에서 베트남 현지 친구를 사귀었다는 걸 자랑하고 싶기도 했다.
“오늘 아침에 현지 친구 톰을 만났는데 톰이라는 애야. 톰이랑 전통차 마시다가 갑자기 톰이 부자 친구를 소개해주더라고.”
“진짜?”
“어. 그 부자 친구가 나한테 람보르기니 보여준다고 하고 6시에 만나서 파티 같이 가자고 했어.”
내 말을 듣고 있던 한 친구의 얼굴을 보니 단단히 굳었다.
“잠시만. 그거 진짜 수상하다. 사기일 수도 있어."
"너 카메라도 들고 다니잖아. 술값이든 택시비든 뭔가 뜯으려고 하는 걸 수도 있어.”
그리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베트남엔 진짜 별별 사기 다 있어. 영어나 중국어로 검색해 보면 수두룩하게 나와.”
옆에 있던 친구도 한마디 보탰다.
“맞아. 진짜 조심해야 돼.”
수상하긴 했지만 대만 친구들이 입을 모아 '사기'라는 단어를 듣자, 마음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진지한 눈빛과 목소리는 내 안의 의심이라는 싹에 물이라도 주는 것 같았다.
"그래..? 나도 뭔가 조금 이상하긴 했어.”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한 친구가 오늘이 하노이 여행 마지막 날이라며 내일 대만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했다.
우리는 언젠가는 또 우연히 지구 어딘가에서 마주치자고 하고 아쉽지만 진짜 작별 인사를 나눴다.
"진짜 조심해!"
여행 초보인 나를 걱정하듯, 대만 친구들은 마지막까지 웃으며 인사했다.
그 모습이 오래 남았다.
금수저 친구와 약속은 이미 해버렸고 대만친구들 말처럼 수상하긴 했지만, 나는 아침에 톰과 금수저 친구와 전통차를 함께 마셨던 마담카페로 향했다.
마담카페가 가까워질수록 스멀스멀 불안감이 밀려왔지만, 동시에 가슴 한켠이 이상하게 설렜다.
배기음 울리며 하노이 밤거리를 달리는 람보르기니, 베트남 재벌 2세랑 어깨 나란히 앉아있는 나.
그림은 그럴싸했다.
그렇게 상상은 멋대로 부풀어갔지만 그런 와중에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뭔가가 계속 걸렸다.
만약 금수저라고 해도 처음 본 사람에게 하는 호의 치고 너무 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의 나는 그런 제안을 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너무 편한 옷차림, 길게 기른 머리, 덥수룩한 수염.
대만 친구들의 말처럼 진짜 나에게 뭔가 뜯어낼 게 있어 보여서 접근한 것 같은 의심이 들었다.
길 위에서 만난 셰프. 길거리 노포 카페. 부자 청년.
이런 상황이 웃기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했다.
마담카페에 가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길가에 서서 핸드폰을 꺼냈다.
먼저 네이버에 ‘베트남 여행 사기’라고 검색해 봤지만, 대부분 블로그 나와 있는 몇 개의 막연한 주의사항뿐.
인스타그램에는 ‘#하노이여행’ 해시태그가 붙은 행복한 사진들뿐.
하지만 도무지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대만친구가 말한 대로 구글에 영어로 검색해 봤다.
'Vietnam travel scam'
번역하기를 누르자, 마치 누가 내 이야기를 적어놓은 것처럼 익숙한 사례들이 줄줄이 나왔다.
공항 앞 바가지 택시, 사진 찍고 돈 요구하는 과일 장수, 길거리에서 갑자기 구두 닦아주겠다는 사람들..
며칠간 하노이에서 ‘문화적 해프닝’이라고 넘겼던 일들이 비슷하게 다 적혀 있었다.
사이트들을 하나씩 들어가며 사례들을 읽었다.
베트남에서 길에서 진짜 현지 친구를 만나고 싶었던 내 마음은 조금씩 굳어지기 시작했다.
혹시 나는 짜고 치는 고스톱판에서 진정한 친구를 찾고 있었던 걸까.
아침까지만 해도 머릿속을 떠다니던 '우연한 만남'이란 단어는 이제 '길 위의 연극'으로 바뀌고 있었다.
6시가 됐고, 나는 계속 구글을 뒤적이며 마담카페 앞에 도착했다.
카페는 이미 문을 닫았고 해가 진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다.
다행히 그 금수저 친구는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영어로 된 커뮤니티에서 한 사람의 경험담이 눈에 들어왔다.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친절한 현지 친구' '갑작스러운 파티 초대.' 그리고 '술집으로 데려가서 뻥튀기로 계산.'
"헤이!"
그 금수저 청년이 눈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