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온전히 내가 내 편이 되어줬다.
호주 육공장을 끝내고 일주일간 발리여행을 다녀왔다.
나에게 주는 선물이랄까.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고 싶었다.
육공장 일을 마칠 때 즈음, 발리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부킹닷컴에서 수영장, 캐노피 침대, 가격만 보고
냅다 예약해 버렸는데
웬 걸, 알고보니 신혼부부들이 많이 예약하는 숙소였다.
혼자서 2인분의 즐거움을 누려보자는 생각을 했다.
첫 날에는 포근한 호텔침구에서 하루종일 잠만 잤다.
두번째 날에는 수영하면서 밤하늘을 보는데
'나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영하면서 밤하늘을 볼 수 있는 삶.
언제든지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삶.
그런 자유로운 삶 말이다.
혼자서 행복함을 느낀적이 손에 꼽는데 이때는 정말 행복했다.
마음속에서 뭉근한 풍요로움이 넘실넘실 거렸다.
처음에 식당에서 발리 전통음식을 먹었는데 너무 맛있었다.
찾아보니 발리 전통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쿠킹클래스가 있었다.
케투스 선생님께서 시장에서 발리 전통 재료에 관해 설명해주셨다.
그리고 쿠킹클래스로 장소를 옮겨 다양한 요리를 만들었다.
오일 조차도 직접 짠 코코넛 오일을 사용했다.
무엇보다 내가 직접 발리 전통음식을 만들어 먹는다는 경험자체가
소중했다.
그 외에도 명상클래스, 요가클래스도 가고 마사지도 받았다.
특히나 명상클래스에서는 90분 동안 몸을 이완하고 숨쉬는 법만 가르쳐줬는데
중간에 잠들 뻔 할 정도로 몸이 이완되기도 했다.
맛있는 것들도 많이 먹고, 재미있는 구경도 많이 했지만
발리에서 특히나 행복했던 때를 생각해보면, 굉장히 심플했다.
밤하늘 보면서 수영할 때,
오토바이 타면서 바람 느낄 때,
문득 올려다 본 하늘에 큰 달이 떠있었을 때,
폭신한 캐노피 침대에 누워서 뒹굴 거릴 때,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서 생각 정리를 하거나 일기를 쓸 때,
온전히 라이브 뮤직을 감상 할 때.
나는 생각보다 간단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걸
이번 여행으로 뚜렷하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일주일 끝에 즈음 가서는 조금 외로웠다. 하하하.
일 한지 이틀 만에 그만둠.
멜버른으로 다시 돌아와 세컨비자를 신청했다.
발리에 있었던 비자 때문에 세컨비자가 통과 될지 안될지는 모르겠지만,
호주로 돌아와서 신청한 세컨비자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친구 덕분에 나는 금방 일을 구할 수 있었다.
야채공장 포크리프트 드라이버였다.
감사하게도 나에게 인수인계 해주시는 분이 한국인이였다.
3주 후에 그분은 한국으로 돌아가야했고,
나는 그 시간동안 빡세게 배워야 하는 상황이였다.
너무 친절하셨고, 어떻게 인수인계 해줄 지에 대한 플랜도 이미 머릿속에 그려놓고 계셨다.
시프트 걱정 할 일 없이 일이 쭉 있었고, 페이도 좋았고, 모든 상황이 다 괜찮았는데
나는 이틀만에 그만뒀다.
.
.
.
일정 시간동안 모든 일을 다 내가 혼자서 해야했다.
공장 안에서 채소가 담긴 빈을 정리하는 일.
하루에 5~6대가 되는 트럭안에 들어있는 빈 업로딩, 언로딩.
특정 회사에 보내야하는 채소 직접 분류하기.
공장 사람들의 요청사항 들어주기.
등등
어마어마한 책임감과 부담감이 몰려왔다.
나는 주말동안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들끼리 싸우고 있었다.
'친구가 소개시켜준 건데,
미안하지도 않냐?'
'모든 상황이 다 괜찮은데
해보지도 않고 그만두는 건,
너무 나약한 거 아니야?'
'나한테는 이 일이 너무 버거울 것 같은데
다들 아무렇지 않아한다고
나까지 아무렇지 않은척 해야하나?'
'모두 나를 반겨주니까
그냥 사람들 믿고 해보는거 어때?'
'인수인계 다 받아놓고 혼자 조금더 하다가
그만두면, 그게 더 책임감 없는거지.'
'프로페셔널한 선임도 쉬는 시간 없이
밥도 못먹고 오버타임까지 해가며 일하는데
과연 내가 이 일을 몇 달간 지속 해나갈 수 있을까?'
'아니. 자신없어. 못해.'
마지막 질문에서 나는 결론을 내렸다.
못 해.
나는 곧바로 선임과 슈퍼바이저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했고,
우연히도 내가 새로 들어간 하우스 오너가 포크리프트 드라이버여서
그 회사에 소개도 시켜주었다.
그렇게 마무리를 잘 하고 나왔다.
.
.
.
정말 마음이 많이 편안했다.
그리고 나서 든 생각은
20대 때, 나는 스스로를 많이 채찍질 해왔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어서 그만하고 싶을때, 그냥 못하겠다고 인정하고 그만하면 되는데
그만두고 나서도 마음 한켠에는 죄책감과 수치심을 달고 살았다.
'남들 다하는데 왜 이것도 못해?'
'왜 이것도 못버텨?'
'으이그, 그것도 못 하니까 네가 지금 이 모양이지'
나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줘야 했는데
그때는 어떻게 그걸 하는 지 몰랐다.
지금 다시 백수지만, 마음이 즐겁다.
내가 내 편이 되어주는 방법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 그만둔 거에 대해서 누가 어떤 반응을 보여도 상관 없었다.
창피하거나 수치스럽지 않았다.
다시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편안히 먹고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하루를 밟아 나가는 중이다. 꾹꾹.
오히려 여기저기서 기회가 들어오기도 한다.
다른 하우스메이트들이 본인이 일하는 곳 슈퍼바이저에게 내 CV를 전달해주기도 한다.
이런 상황들이 그저 감사하다. 내가 일을 구하고 말고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운동도 시작했고, 밥도 잘 먹고, 잠도 잘자고, 취미생활도 한다.
내일의 나를 믿고, 3일 후의 나를 믿는다.
일주일 후의 나를 믿는다.
내가 내편이 되어주는 게 이렇게 든든한 일인지
이번에 처음으로 뚜렷하게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