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수술 후 첫 외래가 있는 날이다.
부모님도 원래 오신다고 하셨었는데 생각해보니 꼭 굳이 오실필요 없는 날이기도 해서 쉬시라고 했는데 이미 호텔을 잡으셨다고 하셨다. 조금 부끄럽지만 이 나이에 엄마아빠남편이랑 같이 병원에 가는 날인거다.
그런데 동생이 자기도 온단다.
뭐허러 와, 쉬어
나는 왜, 나도 갈래.
그럼 나 보러 말고, 엄마 보러 와.
오케 알았어.
그렇게 오늘 오전 9시 반 경.
분당차병원에 어른 여섯이 모였다.
제부야.. 평일에 어쩌자고 여길왔어.
알고보니 내가 오늘 요양병원 퇴원 예정이었고 이걸 늦추었는데 퇴원 축하기념 할 겸 같이 온거였다.
고맙다 어려운 일에, 누구에게도 드러내기 어려운 일에는 늘 가족이 함께 할 수 밖에 없다는것을 느낀다.
우격다짐으로 살았다.
서울에서 밀려 나 부끄럽게 고향으로 밀려내려가지 말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악으로 깡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실수도 잘못도 많이 하고 부끄러운 일도 많았다. 부족했고 어렸고 몰랐고 도움을 구할데가 없었고 억울하고 기가 찬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때마다 부모님께 도움을 구할 수는 없었다. 언니도 동생도 친구도 친척도 동료도 그때는 도움을 구할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홀로 안전한 척 해야했고 완전해야 했다.
곪고 터지고 찢어져도 겉으로는 늘 정상적인 컨디션이어야 했다.
이제는 큰 욕심내지 말고 일을 줄이고 자리도 물려주고 그리 살아야겠다 싶었던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내 뜻대로 되는게 이렇게.. 없을 줄이야.
사람의 기대와 욕심이 전혀 미치지 않는 미지의 삶의 영역에 들었다.
이곳은 진공상태도 아니고 천국도 지옥도 아닌데 사람들은 오늘 하루에 감사하고 그 하루 중 어떤 결과 하나에 슬프고 견뎌낸다.
여기서는 걱정한다고 더 나아지는 것도 없고 기대한다고 기대대로 되는 것도 없다.
지치지 않고 어쩌면, 물아일체의 단계로 가는 것이 유일하게 살아내는 일 아닌가 싶다.
내가 아프다고 할 때 모두는 목구멍안에 뜨거운 횃불을 꿀꺽 삼켰다.
울음을 참고 눈시울이 붉어지더라도, 뜨끈한 눈물이 눈가에서 입술 끝으로 흘러내려가 짭잘한 맛이 나더라도 애써 괜찮다고, 다 잘될거라고 했다.
부모님도 남편도 나도. 직장에서도.
동생은 나의 슬픔 앞에 소리내어 엉엉 울어 준 유일한 이였다.
오롯이 내 편에서 서서, 한 자궁을 셰어했던 존재답게 내 슬픔이 자기 것인양 엉엉 울어주었다.
그 울음이 나에게 큰 용기와 위안이 되었다.
동생이 준 꽃이 너무나 곱고 고와 마음에 든다.
집에다 꽂아달라고 부탁을 했다가, 병실에 둘 수 있다고 해서 가지고 왔다.
간호사샘들이 보시고는 너무 멋지다고 해주신다. 꽃병이 없어 커다란 약 병을 잘라다 갖두 주셨다.
포장지로 주변을 감싸 묶었다.
최고의 꽃, 최고의 위안이며,
행복을 준다.
그대가 아플테니 언니는 반 만 아프라는 동생아
너는 절대 아프지 말거라
내가 아프니 너는 아프지 말거라.
세상에 집집마다의 아픔 총량이 있다면 이것으로 더는 아픔을 주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