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가장 마음에 드는 일을 1순위로 품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들은 인생이 만족스러울지, 그 만족이 행복으로 이어지고 있나.
1순위의 직업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또 어떠려나. 원치 않는 순위를 직업 삼게 되어 좌절하고 지치고 무너지는 데에 익숙해져 영혼 없이 살고 있을지, 아니면 의외로 의연할지, 그들의 삶은 나와 얼마나 다를까.
AE (Account Executive)
광고 회사나 홍보대행사의 직원으로서 고객사와의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는 한편, 고객사의 광고 계획이나 홍보 계획을 수립하고 광고나 홍보활동을 지휘하는 사람.
나에게 AE라는 직업은 딱 이 정도 활자에 불과했다. 인턴 지원할 때조차 AE의 스펠링도 몰랐었으니 당연히 희망 직업 리스트에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입사 초반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한 내가 해내기엔 벅찬 업무라는 부정적인 생각에 부딪힐 때가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5명의 입사 동기들 중에는 시키는 것도 안 시키는 것도 잘하는 척척박사들이 무척 많았다. 어디 신입뿐이랴. 어깨너머 보던 선배들의 일처리 능력은 무능력한 내 마음을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본인들의 직업 정의를 농담 삼아 'Aㅏ 이것 제가 하나요..? Eㅣ것도 제가…?'라고 소개하기도 하지만, 광고주의 요청을 어떻게든 해결해내고 만다.
AE의 주 업무는 결국 광고주의 원하는 바를 되도록 긍정적 방향으로 이뤄줘야 하는 일이다. 때문에 경험도 융통성도 부족한 나 같은 저연차라면 기획을 할 때마다 더더욱 고민이 깊어진다. 특히 시안을 고를 때가 가장 괴롭다. 내가 만족하는 안을 1안으로 올릴 것인지, 광고주의 성향이 적극 반영된 안을 1안으로 올릴 것인지 수없이 고민하게 된다.
생각은 길어지고 데드라인은 다가온다. 수정까지 생각하면 시간이 매우 촉박하다. 여기서 더 늦어지면 제작팀에 죄송할 일이 또 생긴다. 생각은 더 이상 안 하기로 했다. 마우스와 키보드를 바삐 움직였다. PPT 장표가 위아래로 왔다 갔다 춤을 춘다. 감사합니다-로 마무리되는 메일까지 빠르게 전달 완료했다.
광고주님의 마음은 참 어렵다. 어떨 때는 얼터안 필요 없고 요청사항만 명확하게 보여달라 하다가, 어떨 때는 또 요청사항대로만 와서 아쉽다고 한다. 언제쯤 그들의 마음을 딱 알아차릴 수 있을까? 1년? 5년? 아니, 10년 정도는 버텨야 깨닫게 될 것인가.
광고주에게 좋지 않은 피드백을 받기라도 하면 멘탈이 와장창 무너지곤 했다. '역시 난 안되나 봐' 따위의 생각이 마음을 갉아먹어댔다. 1순위로 품었던 그 일을 했다면 이렇진 않았을 텐데, 조금만 더 노력해서 그쪽으로 갈 걸이라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그렇게 절망감에 빠져 텅 빈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동기들과 우리 일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예전에 우리가 받았던 평가들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고 선배들 또는 동기들이 바라보는 내 능력치가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 스스로에 대해 찬찬히 돌아보게 되었다.
‘그래, 어차피 언론고시는 SKY 밭이야. 내가 비빌 곳이 아니었지. 사실 여기 들어온 것만으로도 난 행운아 일지 몰라! 인턴 면접에서 떨어진 친구들도 수두룩 했잖아. 그리고 이 정도 스펙에 이 정도 버틴 거면 오히려 잠재력 있는 거 아닐까….’
밑도 끝도 없는 이 속엣말을 그 후로도 멘탈이 터질 때마다 주문처럼 되뇌었다. 덕분인지 모르지만 다행히 나는 올해도 AE로 일하고 있고 4년 전 그 어깨너머 선배로 진화하고 있었다. 이제야 이 일이 나랑 좀 맞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껏 살면서 내가 생각하고 정한 대로 일이 일어난 적은 거의 없었다. 사건의 시작은 대부분 마음속 순위권 밖에서부터였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떤 일이든 일단 시작했다면 믿고 가기로 했다.
광고주 피드백은 항상 내 마음과 반대로 오지만 뭐 괜찮다. 언젠가는 내 마음에 드는 1안이 주님 마음에도 꼭 들도록 하면 되니까. 내가 택한 시안이 그렇게 별로인 건 아닐 거야, 광고주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라는 자기 위로를 하며, 그렇게 나를 믿어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