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타다 뜻밖의 재능을 발견한 사람의 이야기
여전히 주말마다 한번씩 또는 두번씩
꾸준히 승마장에 가고 있다
날씨가 훅 더워져서 연속 두번의 수업을 듣는 것은 힘들어졌다
조금만 뛰어도 숨이 차고 셔츠가 흠뻑 젖는다
말의 리듬과 함께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는 경속보를 계속 하다가
지난 시간에는 좌속보를 처음으로 배웠는데
"소설은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쓰는 거에요" 라고
어떤 소설가가 말한 것이 생각났다
소설만 엉덩이로 쓰는 것이 아니었어
내 승마의 역사도 엉덩이로 쓰여진다
좌속보는 말그대로 앉은 채로 말의 반동을 그대로 받으며 타는 것인데
말이 빨리 걸을수록 빠르게 당당당당당-
말의 등과 나의 엉덩이가 1초에 두번씩 박수를 친다
코치님은 명치가 울려야 좌속보가 제대로 되는 거라고 했는데
나는 명치는 모르겠고 엉덩이가 너덜너덜해지는 기분이었다
처음부터 좌속보를 하면 그 리듬을 읽을 수 없으니까
말의 속도에 익숙해질 때까지는 경속보를 하다가
리듬을 읽게 되면 좌속보를 연습하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읽을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다
말이 던지는 많은 정보를 맥없이 흘려보내고
머리가 배우기 전에 엉덩이로 먼저 배운다
승마바지의 엉덩이와 허벅지 부분에 패치가 붙어있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리고 오늘이 왔다
네명의 코치님을 오가며 배우지만
가장 자주 만나는 코치님은 깃털 코치님이다
코치님은 얼굴을 보며 크게 인사를 하고
수업 중에는 눈을 마주치고 코칭을 한다
말로 해서 모르면 말을 세우게 하고 다가와서
다리의 어디에 힘을 줘야 하는지
콕 집어 이야기해준다
무언가를 배우고 있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주는 사람이다
오늘도 깃털 코치님이 다가와서 오공이를 데리고 가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수업에서 오공이가 한번 크게 튄 적이 있어서
안정을 시킬 겸 코치님이 오공이를 타고 먼저
몇바퀴를 돌겠다고 했다
코치님이 말을 타는 것을 처음 봤다
저토록 가볍게 경속보를 하는 사람이라니
저렇게 등자에서 발 뒤꿈치를 밑으로 재껴내린 자세라니
선 자리에서 뱅글뱅글 돌며 코치님의 자세를 흘깃거리며 든 생각은
참 적당하다는 것이었다
말도 사람도 무리하는 것이 하나도 없이 가볍게 뛰는구나
오늘은 혼자 수업을 받는다
아주 집중적으로 코치님이 자세를 바로잡아줬다
-
발 뒤꿈치를 내리는 것은 이제 잘 된다
말을 차는 힘은 여전히 부족하다
차는 것 대신에 앉으면서 말의 배를 꾹 안아서 압박하면
저절로 속도가 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종아리 안쪽 힘을 잘 써야 된다
오리궁둥이처럼 엉덩이는 뒤로 빼고
허리는 낮추고 골반 앞에 힘을 준 자세에서
종아리 안쪽에 힘을 주면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옳지 옳지 옳지!
코치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하라는 대로 자세를 바꾸며
요리조리 애를 써보는데
헙
갑자기 앉을 때 종아리 안쪽에 힘이 들어가면서
발로 차지도 않는데도 오공이가 앞으로 쭉쭉쭉 나간다
뭐지?
옳지! 옳지! 옳지! 라고 소리를 치던 코치님이 갑자기
소리친다
-
회원님, 천재라니까요!
승마교습 14회째에 들은 쾌거니까
다시 한번 들어본다
회원님, 천재라니까요!
갑자기 들은 칭찬에 어리둥절하면서 기분이 당그닥당닥 좋아지길래
천재요? 데헤헤헤헷 하고 있었더니
코치님이 흥분해서 계속 말을 이어간다
-
진짜에요. 진짜 천재에요.
이렇게 말하는 대로 그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 드물다니까요?
보통 가르쳐줘도 잘 못받아들이는데
회원님은 그대로 다 받아들인다니까요!
저 진짜 이런 말 잘 안해요!
헤헤헤헷 정말요? 헤헤헤헷
저 막 흡수해요? 스폰지처럼 막 쭉쭉?
그거 정말 천재 스토리잖아요??? 헤헤헤헤
-
이렇게 종아리에 힘을 줄 수 있는 자세가 제일 중요한데
이걸 잘 안가르쳐주는 경우가 많아요
무릎에 힘주지 말고 무릎을 벌려서
종아리로 말을 더 안으려고 해보세요
다른 코치님은 이렇게 하지 말라고 할 수 있어요
정말 그렇다
깃털 코치님한테 배운 무릎벌리기를 했다가
밤톨 코치님한테 무릎 붙이라는 이야기를 몇번 들었다고 그랬더니
-
아! 다리 일자로 만들라고 하죠?
일자로 하는 건 정말 나중에 잘 훈련된 말 탈때
그때 해도 되는데...
지금은 기본자세가 정말 중요해서
평보만 한달동안 배우면서 이 자세 연습만 해도 모자른건데!!
다른 코치님이 뭐라 그러면
그냥 앞에서만 몇번 하고 하지마세요!
아, 이건 비밀이에요.. 우리끼리 비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럴까요? 비밀로 할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정말 이렇게 종아리에 힘을 주니까 아픈데가 없어요
발목이랑 무릎이 항상 아팠는데
오늘은 하나도 안아프고 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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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니까요!!
제가 진짜 제 입으로 말하기 민망하지만
이게 제대로 된 교습이에요
한국은 빨리빨리 가르치느라 이걸 잘 안하는데
저는 독일에서 배워서 이거를 정말 중요하게 배웠거든요
독일???
우리 코치님 독일유학파셨구나!
이렇게 깃털처럼 가벼운 양반이 2미터 꺽다리들 사이에서 애먹은 건 아닌지..
인종차별주의자놈들한테 험한 꼴 당한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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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님은 오히려 배운지 얼마 안되서 가르쳐준 대로 할 수 있는거에요
오래 배운 분들은 습관이 되서 잘 못고쳐요
하얀 도화지 같으니까 할 수 있는 거에요
중요한 문장이니까 한번 더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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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도화지 같으니까 할 수 있는 거에요
도화지??
하얀 도화지???
천재 다음에 도화지????
막 세살 아이처럼 그런 도화지???
직장 16년차,
잘해도 중간 아니면 욕먹을 일밖에 없는 시니어는
입꼬리가 올라간다 가슴이 뛴다
나도 다시 칭찬받을 수 있어!!!
나도 다시 쑥쑥 클 수 있어!!
나는 크고 아삭아삭한 당근을 잔뜩 던져준
나의 어린 코치님에게 그만 마음을 열어버렸다
제가 빨리 코치님을 만난 게 정말 운이 좋네요. 말하자 더없이 뿌듯한 표정으로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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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님은 말을 오래 타실 수 있을거 같아요
뿌듯한 얼굴이 뿌듯한 얼굴을 마주하며 다짐한다
나는 코치님의 비밀 천재제자가 될것이다
다른 어떤 코치님이 무릎을 좁히라고 해도
나는 빙그레 웃고 시늉만 할 것이다
나는 당신의 비밀 천재제자.
우리의 비밀은 아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