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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난 Jun 24. 2019

망하면 망한대로

 야근에 야근에 야근을 연이어하던 날들이었다. 나는 이러고 사는데 남들은 뭐하고 사나 궁금해서 블로그들을 돌아다니다가 어느 공방을 발견했다. 한참 더 그러고 살다가 거짓말처럼 한가한 연말을 맞이하게 된 어느 날, 패딩 코트로 중무장을 하고 나가 나무공방에 입적했다.


수업의 시작은 퀴즈였다. 진지한 얼굴의 선생님이 나무 이름 퀴즈를 냈다.


“미송은 뭘까요?”

“음... 아름다운 소나무...?”

“미국 소나무.”


(이럴 수가! 미국 소나무...!)


“뉴송은요?”

“음.. New니까 신상..”

“뉴질랜드 소나무.”


(또 속았네...)


“그럼 홍송은?”

(이제 눈치챘다.)

“홍콩 소나무!”

“땡. 빨간 소나무요.”


소나무의 이름은 소나무답지 않게 유연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다음에는 자재에 대해 배웠다. 싼 자재는 물러서 자르기 쉽고 못을 박기 쉽고 칠하기 쉽지만 쉬운 만큼 잘 변형되고 잘 깨진다고 했다. 비싼 자재는 단단해서 자르고 못 박고 깎기가 어렵지만 어려운 만큼 변하지 않고 변해도 은은하고 멋지게 변한다고 했다. 이른바,


발전적 변형.


 하루에도 서너 번씩 꼰대들한테 까이느라 매일 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발작적 변형을 하고 있던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말이 있다면 그것은 '발전적 변형'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무가 비싸면 변형도 이렇게 발전적으로 하는구나 감탄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또 허를 찔렀다.


“하지만 가격으로 나무들을 계급화시키는 것은 못난 짓이고 사실 어떤 나무라도 좋은 아이디어를 만나면 제 쓰임을 하게 돼요.”

 

 다음은 실습이다. 첫 번째 연습 삼아 만들어 볼 것은 공구상자. 목공예의 기본이 되는 사포질과 구멍 뚫기와 못 박기와 각종 공구 사용을 연습해볼 수 있고 이 첫 번째 작품은 앞으로 앞치마와 개인용 드릴을 보관할 수 있는 공방 필수품이 된다고 했다. 재료는 저렴한 미송 합판. 싸고 무른 나무가 초보 목수의 손과 만나면 목공의 재미와 성취감까지 선물해주는 것이다. 설계도를 그린 후에 다섯 장의 합판을 가져다가 매끈하게 사포질을 했다. 전동으로 사포질을 할 수 있는 기계(샌딩기)는 딱 다리미처럼 생겼는데 손잡이를 잡고 스위치를 올리면 손바닥에서 손등으로, 손등에서 팔로, 팔에서 겨드랑이로 달달달달 전율이 전해져 왔다. 몸이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전율을 잠시 느꼈을 뿐인데 무른 나무라서 순식간에 사포질 완료. 사포질을 끝냈으면 저기 널찍한 작업대로 필요한 공구들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처음 보는 공구들은 제각각 다양했다. 구멍 뚫고 못 박는 동안 합판을 흔들리지 않게 지탱해줄 받침대. 못을 박기 위한 전동드릴. 전동드릴에 꽂을 나사못. 사포질을 마친 다섯 장의 합판. 전동드릴에 개인용 드릴심을 끼워서 고정한 뒤 구멍 뚫기를 연습했다. 나사못을 바로 박는 것이 아니라 못이 들어갈 자리를 먼저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나무가 상하지 않고 못이 예쁘게 들어간다. 전동드릴의 힘은 대단해서 팔에 힘을 조금만 줘도 사정없이 깊게 구멍이 뚫려버렸다. 어디서 힘을 멈춰야 할지 모르겠어서 “깊이를 어떻게 가늠하죠?”라고 물었더니 선생님이 답했다. “감이죠.” 아, 감이구나. 감을 믿고 힘차게 구멍을 뚫은 후 나사못을 박았더니 못이 나무속으로 쏙 들어갔다. 너무 힘을 세게 준 것이다. 난감한 미소를 지었더니 선생님이 말했다. “세게 말고 유하게, 유해져야 돼요.” 이번에는 초보다운 자세로 반듯하게 합판의 각을 맞추려고 애를 썼더니 선생님이 말했다. “너무 딱 맞추지 말아요. 원목은 얼기설기하는 거예요.”


감으로. 유하게. 얼기설기.


전동드릴 몇 번 돌렸을 뿐인데 벌써 상자가 만들어졌길래 제일 먼저 칭찬을 받고 싶어서 도구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어느새 옆에 와있는 선생님이 말했다. “마지막은 언제나 샌딩. 사포질로 부드럽게 만들어야 끝이 나는 거예요. 뾰족한 모서리를 둥글둥글하게.” 그러고 나서 내 공구상자를 봤더니 모양은 갖췄지만 모가 졌다. 누구라도 다칠 수 있는 뾰족함이다.


감으로. 유하게. 얼기설기.

그리고 둥글둥글.


그렇게 나는 나의 첫 번째 목공예 수업에서 두 시간 동안 깎였다. 탈탈탈탈 팔과 어깨를 털리고 딱 잡힌 각을 무너뜨리고 흉한 모서리를 둥글렸다. 회사에서 차곡차곡 쌓은 뼈를 무너뜨렸다. 뭉친 근육이 변형되었다. 발전적 변형.


마지막의 마지막은 공구상자에 내 이름을 새겨 넣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깔끔하게 망해먹고 “휴. 저 망했어요”라고 고백하자 선생님이 마지막 가르침을 전해줬다.


“망하면 망한대로. 망한 게 더 나중엔 기억에 남는대요. 저도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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