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밤 퇴근을 하면 시외버스를 타고 애인의 집으로 가던 날들이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고 아침엔 산책을 하고 낮술을 마시고 그렇게 두밤을 보내고 일요일 오후에 내 집으로 돌아와서 “좋은 주말이었다”라고 생각하던 날들이었다.
어느 일요일 오전에는 A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다. A가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켰고 할 일이 없는 나는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켰다. 탁탁 소리를 내는 A의 등을 보면서 볼륨을 최대한 낮추고 예능을 보며 숨죽여 웃었는데 A는 몇 번이나 들척이더니 뒤돌아서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슬프게 말했다. "미안한데 나 집중을 할 수가 없어."
나는 번쩍 정신이 들어 미안하다 말했다. 민망해서 앉아있을 수가 없길래 일어나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집에 가겠다고 했다. A는 말리지 않았다. 현관문을 나서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미안하다 말했다. 세 번쯤 말했다. 버스정류장은 길 건너에 있었다. 횡단보도는 이상할 정도로 멀리 있어서 차라리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내려가서 다시 건너편의 출구로 올라가는 것이 빨랐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과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들을 눌러 밟으며 나는 원룸에서는 서로가 다른 일을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한 가지 일을 같이 할 때는 둘만의 성 같던 원룸은 둘이 서로 다른 소리를 내는 순간 감옥이 됐다. 미안하고 민망했던 건 다 원룸 때문이었다. 원룸이 싫었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원룸을 원망하고 있는데 내가 건너온 저 건너편에서 동그란 머리가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넓고 복잡한 길을 무단 횡단하는 사람을 처음 봤는데 그 사람은 나를 추방시킨 내 애인이었다. A가 도로를 가로질러 점점 가까워지더니 내 앞에 섰다. "이렇게 보내기 싫어서 뛰어나왔어."
기분이라는 것은 내려갈 때는 한순간인데 올라올 때는 엉덩이가 무거워서 뜨뜻미지근한 채로 손을 잡았다. 따뜻하다 싶은데 버스가 왔다. 버스에 타서 차창 밖을 쳐다봤더니 손을 흔드는 긴팔원숭이가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시 내가 좋아하는 얼굴을 하고 우스꽝스럽게 양 팔을 흔들고 있었다. 흔들리는 양 팔이 작은 소리로 “웃어줄래?”라고 말하고 있었다.
버스에 앉아서는 무슨 생각을 했더라. 그때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아직도 가끔 소파에 앉아서 낮게 킥킥대던 나와 노트북을 툭탁이다 뒤돌아서 팔자 눈썹을 만들던 A. 그 사이의 온도를 기억한다. 방금 전까지 껴안고 있던 사람이 전해준 머리가 쭈뼛하는 서늘함을 기억한다. 그리고 나면 기억이 이어진다.
저 멀리 푸석한 얼굴로 뛰어오는 사람.
숨을 몰아쉬며 만든 이마 주름.
그 방에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방에 혼자 남아서는 그럴 수 없었던 마음.
그 마음이 달리기로 바뀐 순간.
서운했지만 고마워서, 서운했지만 따뜻해서, 서운했지만 서운해하기 싫었던 그 날의 기억은 수없이 되풀이되는데 그래도 나는 꽁한 사람이라 기억의 시작은 늘 서운함이다. 서운함에서 시작해서 긴팔원숭이로 마무리된다.
긴팔원숭이가 팔을 흔든다. 내가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