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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난 Jan 12. 2019

공동거주 실험 : 5일의 기록

집에서 배운 것

4일째, 월요일

 

 주말에 밥을 지을 때 정말 조금 했는데도 고기 먹느라 밥 먹을 틈이 없어서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이 음식물을 남겨둘 수가 없어서 7시에 일어나서 씻고 아침상을 차렸다. 아침밥을 챙겨 먹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다 같이 지하철역으로 나섰다. 카페에 들어가 앉아서 커피 한잔하면 딱 좋겠는데 왜 월요일이지. 나는 공항철도 방향으로, 유기자랑 윤서는 2호선으로. 이 동네를 거주지역으로 정한 것에는 세 명의 회사를 고려했을 때 모두에게 멀지 않은 곳이라는 점도 작용했는데 나의 새로운 출근길이었던 공항철도는 지하철이 가는 길이라기보다는 지하철을 향해 인간이 걷는 길이라고 보는 것이 맞아 보였다. 걷고 걷고 걸어서 지하철을 겨우 타서 트위터를 몇 개 보려고 치면 벌써 서울역에 도착했고 역에서 내리면 또 목적지를 향해 내 두 발로 걷고 걷고 걷고 또 걸어야 했다. 지하철비는 지하철 공사가 가질게 아니라 내가 받아야 할 거 같은 기분. 너무 일찍 출근할까 봐 걱정했는데 역시 지각이다.

 오후 4시부터 퇴근하고 싶었는데 야근을 했고 저녁까지 회사에서 먹었다. 퇴근이 하고 싶은 거는 직장인이 된 이후 늘 상비하고 있는 욕구였지만 집에 가고 싶다는 기분이 드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눈이 엄청나게 내리고 그치고 녹고를 반복하다 다시 눈이 그쳤을 때 퇴근을 했다는 소식이 하나 둘 울리고 오늘은 외식을 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져 오고 사진이 몇 장 오고 발을 동동 구르고 난 후 나도 그곳에 도착했다. 새우장을 시켜놓고 야무지게 머리 따고 꼬리 따고 먹고 있는 동거인들을 만나서 도루묵찌개를 기다리는데 홍합탕이 잘 못 나왔다. 홍합탕은 배가 안 부르기 때문에 후루룩 마셔버리고 추위를 뚫고 뛰어 동네 슈퍼에 갔다. 이런 날씨엔 뜨거운 정종이지! 백화수복 대자를 사서 집으로 들어가 전자레인지에 덥히면서 남은 삼겹살에 남은 호박에 남은 숙주를 넣고 볶았다. 페이스타임으로 싱가포르에 거주 중인 벗, 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란히 소파에 앉아 나리를 마주하고 수다를 떨며 뜨거운 정종을 건배했다. 통화를 마치고 남은 연어와 남은 밥으로 김밥을 말아먹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냉장고에 남은 베이컨과 계란으로 아침상을 차려 먹자는 이야기를 하면서 잠을 잤다. 공동거주 후에 남는 것은 돼지 3인 일 듯한 예감이 강하게 왔다.



닷새째, 화요일
 

 누구도 일찍 일어나지 않았다. 전기밥솥에 예약 취사를 해놓은 감자 네 알이 맛있게 쪄졌길래 윤서가 싸갔다. 이제 감자는 한알만 남았군. 

 일이 엄청나게 많은 날이었다. 회의가 많고 정말로 하기 싫은데 절대 끝나지 않는 일이 있었다. 전력으로 하기 싫어하느라 시작도 못한 일. 그 일을 하느라 오늘도 야근이다. 점심은 도시락을 시켜먹고 저녁은 김밥을 시켜먹었다. 윤서가 귀가해서 지하철역에서 집으로 가는 동선에서 술장(=술을 장보는 행위)을 봤다는 소식이 왔다. 그 가게 옆 타파스 식당이 맛있다는 소식도 왔다. 아, 나도 가고 싶은데. 열 시쯤 귀가. 에네스 사건 (당시 인기였던 비정상회담의 터키인 대표 에네스의 불미스러운 사건) 같은 것이 터졌을 때 집에 친구가 있다는 것만큼 좋은 건 없다. 귀가택시에서 생각했던 대박 사업 아이템 세 가지를 떠들면서 테킬라를 마셨다. (동거인의 수가 많았지만 술의 종류도 늘어난다.) 내년엔 각자 뭔가를 해보자며 흥분하고 있는데 유기자가 튀김소보로를 들고 귀가. 밥을 안 먹었다 그래서 남은 토마토소스와 간 돼지고기를 넣고 파스타를 만들었다. 연이어서 사업 이야기를 하며 떠들고 있는데 남자 친구한테 눈이 온다는 문자가 왔다. 베란다 커튼을 젖혀보니 우와, 눈이 언제 이렇게 왔지. 언제 이렇게 쌓였지. 이 집은 번화된 길에서 한번 꺾여 들어간 골목에 있을 뿐 인데도 정말 조용하다. 좁은 골목에 눈이 쌓여있고 가로등이 빨갛다. 모자를 쓰고 우르르 뛰어나갔다. 자정이 넘었는데 눈이 쌓여있고 집에 친구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취했고 춥고 내일은 지각을 할 거 같고 여전히 일이 많고 여전히 하기 싫지만 참 즐거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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