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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난 Jan 12. 2019

공동거주 실험 : 3일의 기록

집에서 배운 것

공동거주인원>
대학 친구 3인 : 유기자, 윤서, 나

공동거주공간>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의 모 빌라 : 방 3개, 거실 1개, 부엌 1개, 화장실 1개, 베란다 1개 

공동거주기간>
10일


실험 1일째, 금요일


 퇴근을 하니 8시. 거주공간에 두 번째로 도착했다. 연남동 어느 골목에 위치한 빌라에는 멀쩡한 방이 세 개가 있고 베란다에는 동그란 테이블과 캠핑의자가 두 개 있고 거실에는 3인 소파가 있었다. 보일러를 틀어놓고 첫날밤은 외식을 하기로 했다. 함께 사는 공간으로 이 집을 선택한 이유는 가볍게 나가서 밥 한끼, 술 한잔 하기에 적당한 동네인 동시에 집이 골목 안으로 들어가 있어서 '진짜 집' 같은 느낌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혼자도 둘도 아닌 셋이 살아보는 김에 마당있는 주택을 빌려보는 것은 어땠나 싶다. 돈은 훨씬 더 많이 들었겠지만 새로운 형태의 가족과 동시에 꿈꾸던 집의 형태까지 실험해볼 수 있었을 텐데. 

 첫날에는 역시 고기. 맥주를 마시면서 고기를 기다리다가 고기를 먹으면서 와인을 기다렸다. 첫 날의 가족 회식을 마치고 나왔더니 길에는 만두집이 참 많았다. 우리 셋은 모두 만두를 매우 좋아한다. 배가 부르지만 찐만두 한 접시 사서 귀가하기로 했다. 첫날밤의 계획은 방 정하기. 제비뽑기로 방을 정하기로 했는데 긴장감이 넘쳤다. 윤서가 가장 큰 안방, 유기자가 중간 방, 내가 가장 작은 방이다. 짐의 크기가 방의 크기와 같아서 별 불만이 없었다. 이 집의 주인 내외는 방송국과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래서 우리와 일적으로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내 방 책장에는 <The Show>와 <트렌드 코리아 2013>이 꽂혀있었다. 내 사무실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범주 안의 책들이다. 유기자의 방에는 타이핑기가 놓여있었다. 잘 어울리네. 화장실에 각자의 칫솔을 꽂아놓는 것으로 영역을 표시했다. 와인을 한병 까놓고 TV를 보면서 시작한 것은 뜨개질. 새로 시작한 나의 취미다. 이 날 점심시간에 남대문에 가서 빨간색 두꺼운 실을 사 왔기 때문에 이 날 저녁엔 넥워머를 떴다. 셋 다 짐을 챙겨 오지 않았지만 난 그래도 잠옷 한벌을 챙겨 왔고 유기자는 칫솔이라도 챙겨 왔는데 윤서는 정말로 무엇하나 챙겨 오지 않아서 이날 밤, 집으로 돌아가서 내일 다시 오기로 했다. "야, 그건 규율 위반이지!"라고 말했다가 "네가 사감이냐?"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네. 공동생활에 사감은 필요 없지. 윤서가 가고 둘이 남아서 와인을 마시면서 뜨개질을 이어서 했다. 유기자가 먼저 자러 들어가고 난 계속 뜨개질을 했다.



둘째 날, 토요일

 

 10시 넘어 일어나서 짐을 챙겨 오기로 했다. 옷만 주워 입고 나섰더니 이 동네는 아침에도 활기가 넘쳤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길에 보이는 커피숍에서 감기가 심한 유기자는 사과 레몬차를 사고 나는 커피를 샀다. 커다란 종이컵을 들고 아침부터 홍대 거리를 걸으니 잘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캐리어에 잔뜩 짐을 꾸리고 샤워를 하고 밥을 먹고 난 후 부모님 집을 나와 유기자와 만났다. 말했는지 모르겠는데 우리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산다. 10년 넘게. 대학시절 어쩌다 보니 부모님이 같은 아파트 단지에 집을 구하셔서 절친과 동네 친구가 되는 행운을 얻었다. 그래서 내가 여행을 가거나 유기자가 어학연수를 갔던 시기를 빼면 10년 넘게 일주일에도 두세 번 또는 네다섯 번 꾸준히 만나서 놀던 사이라서 사실 하우스메이트가 된 것이 큰 변화는 아니었다. 감기, 비염, 과음 등등의 이유로 일 년에 360일 정도는 코가 막혀있는 유기자와 지하철을 탔다. 도착한 집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커다란 전지에 야심 차게 식단계획을 짠 것이었는데 식성이 비슷해서 칸을 메우는데 거침이 없었다. 일단 3일 치 식단을 빼곡하게 짜 놓고 소파 뒤에 붙였다. 뿌듯했다.

 뜨개질을 하면서 TV를 보고 있는데 윤서가 거대한 캐리어를 끌고 왔다. 큰 방에 어울리는 짐의 사이즈였다. 환영의 의미로 도미노를 문 앞부터 거실까지 장식해서 (이 집에 도미노가 있있다) 발로 까고 들어오게 했는데 도미노는 중간에 세 번이나 끊겼다. 대신 방금 완성된 따끈따끈한 빨간 넥워머를 윤서한테 선물했다. 이제 본격적인 공동거주생활 시작. 장보기다인근 대형마트로 가는 길에 자취생의 벗, 다이소에서 커다란 냄비를 샀다. 만두 쪄먹으려고. 파티용 냅킨도 샀다. 저녁에 친구들을 초대해버렸기 때문이다. 멋진 걸 사고 싶었지만 다이소의 물건들은 멋질수록 손이 안 간다. 누구도 장보기 리스트를 적어오지 않아서 생각나는 대로 먹고 싶은 것을 공격적으로 담았는데 계산할 때 보니 고기가 참 많았다. 혼자 장을 볼 때는 못 느꼈던 카트를 가득 채우는 즐거움을 느꼈다. 셋이 모두 양 손에 바리바리 들고 올라와서 택시를 잡으러 가는 길에 누군가, 뭐 빠뜨린 거 없지? 하고 물었고 누군가 피자 도우를 빠뜨렸다고 말했다. (저녁에 예정된 파티 메뉴가 피자였다) 택시 타기 전에 이런 것도 생각나고 엄청나다. 역시 여럿이 함께 장을 보니까 집단 지성이 발휘되는구나. 유기자더러 짐을 보고 있으라고 하고, 윤서랑 둘이 다시 걸어내려 가서 피자 도우우 믹스를 사고 너무 배가 고파서 도우 만들어지는 사이에 빨리 해 먹을 수 있는 간이 피자 재료로 토르티야도 샀다. 공동거주를 축하하기 위해 꽃을 사려고 했는데 마트 꽃이 매우 비쌌다. 그래도 기념이니까 한 단 살까?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데 소비 요정 윤서가 '안돼'라고 말했다. 윤서가 지금껏 무엇을 산다고 했을 때 안된다고 말하는걸 처음 들었기 때문에 듣기로 했다. 

 집에 와서 허리 높이의 냉장고에 식재료를 다 넣으니 냉장고가 터져나갔다. 고기 위에 고기, 연어 위에 문어, 맥주 뒤에 맥주를 쌓아 올렸다. 문을 열 때마다 계란이 떨어져서 깨지던가 맥주가 떨어져서 구른다던가 귤이 떨어진다던가 그런 일이 수차례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이래서 다들 디오스 디오스, 자이 자이 하는 거구나. 냉장고의 크기란 가족의 크기에 비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븐이 있다면 피자를 더 즐겁게 만들었겠지만 오븐이 없는 집이라서 프라이팬 두 개를 이용해서 기계처럼 토르티야 피자를 찍어냈다. 토마토소스 위에 토핑을 계속 바꿔가면서 실험적인 피자를 생산해냈는데 계란을 올려도 맛있고, 가지를 올려도 맛있고 버섯을 올려도 맛있었다. 맛있는 것만 올리는데 맛있는 음식이 만들어지는 건 당연하다. 피자 도우를 반죽하면서 흥분도만큼 물을 넣었더니 이거 뭐 죽도 뭐도 아니길래 오고 있는 친구들에게 중력분 좀 사다 달라고 부탁해서 밀가루를 잔뜩 넣고 엄청난 양의 피자 도우를 만들어냈지만 결국 이 날 구운 것은 토르티야 피자 일곱 판과 피자 도우 피자 한판이었다. 여섯 명이서 피자 여덟 판을 먹었더니 매우 흡족한 파티가 되었다. 결혼한 친구인 래래네 집에 놀러 가면 래래 남편인 초짱이 우리한테 "자고 가"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난 그게 참 부러웠다. "자고 가"라고 말할 수 있는 건 호스트만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도 친구들에게 해봤다. "자고 가." 하지만 아무도 자고 가지 않아서 다시 셋이 남았다.

 친구들이 가고 설거지를 잔뜩 하고 쓰레기를 모아뒀다. 빌라 문에 쓰레기를 화, 목, 일 일몰 후에 내둬야 한다고 쓰여있었다. 이런 시적이고 탄력적인 쓰레기 배출시간이라니 멋지다. 집안 정리를 마치고 셋이서 나란히 앉아 <그것이 알고 싶다>를 봤다. 뜨개질 손은 웬만해서는 멈추지 않는데 잠시 멈춰야 할 정도로 화가 나는 내용이었다(지금은 내용 기억 안 남). 함께 분노할 수 있어서 좋았다기보다는 함께 봤더니 분노의 양이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화를 내다가 한 명씩 방에 들어가서 잤다. 윤서가 졸리다고 먼저 들어가고 나랑 유기자가 나머지를 다 보고 남은 분노를 소진한 후 잤다.



셋째 날, 일요일

 

 유기자가 피곤한 얼굴로 출근을 하면서 말했다. "낯선 집이라 보안이 걱정돼서 새벽 4시 반까지 불침번 서다 잤어." 유기자는 상당한 겁쟁이이기 때문에 깨어있는다고 해서 우리 집 안전도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수고가 많았네. 의외의 인물이 가장의 역할을 하는구나 싶었다. 유기자가 나간 후 윤서와 나는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 동네 산책 겸 외출을 했는데 마침 비가 오길래 창이 큰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동네에 커피숍이 많으니까 참 좋다. 커피를 마시면서 나는 뜨개질을 하고 윤서는 책을 읽었다. 이 카페에서 하늘색 모자가 완성됐다. 앞통수는 그럭저럭 봐줄 만 한데 뒤통수는 절벽처럼 떨어지는 디자인. 윤서를 줬다. 긴 파마머리는 모자가 이상해도 잘 어울리네. 카페 1층에 베트남 쌀국수를 팔았는데 고기 국물 냄새가 너무 좋아서 매우 흔들렸지만 우리는 밥을 전기밥솥에 안쳐놓고 온 생활형 자취인이라서 커피만 마시고 들어갔다. 혼자였다면 먹고 들어갔을 텐데. 충동적인 사람들이 함께 살면 충동의 전체량이 줄어들기도 한다는 것을 배웠다. 

 김치찌개만 가볍게 끓이려고 했는데 어제 사둔 삼겹살이 너무 맛있어 보여서 고기랑 야채도 구웠다. 비도 오고 날씨는 따뜻하길래 베란다 테이블에 상을 차렸다. 밖은 흐리고 고기는 맛있고 집은 안락하고 너무 좋네. 고기를 먹다가 김치찌개를 먹으며 한참 수다를 떨다가 윤서가 함께 봐서 가장 재미있는 TV 프로그램인 인기가요를 보자고 해서 거실로 들어왔다. 요즘 인기가요는 오후 한 시에 한다고 한다. 전국 노래자랑도 아니고. 이날 오후, 계속 털실을 만지작 거리던 윤서가 뜨개질의 세계로 들어왔다. 몇 년 전 뜨개질에 입문해서 남자 친구 목도리를 짜려했지만 남자 친구 부재로 첫 작품이 성사되지 못해 뜨개질계를 잠시 떠났던 윤서가 모자로 재입문. 소파에서 뜨개질을 하며 떠들고 있는 사이 슬슬 해가 지는 거 같고 유기자의 귀가 시간이 다가오고 어젯밤에 피자 도우로 만들어둔 반죽이 베란다에서 식고 있길래 우리가 만든 저녁 메뉴는 수제비다. (식단표에 없던 메뉴 등장) 첫째 날에 산 유일한 세간, 큰 냄비에 아리수를 채워 넣고 파와 양파를 숭덩숭덩 넣고 팔팔 끓여 육수를 내는데 삼십 분째 끓여도 맛은 맹맹. 너구리 다시마와 수프를 넣었더니 단 숨에 해결. 반죽을 뜯어 수십 개의 작은 빵이 떠있는 듯한 (피자 도우용 밀가루 반죽이었기 때문에 이스트가 조금 들어가 있었다) 수제비를 만들고 계란을 풀었더니 맛있네. 주말 노동을 마치고 귀가한 유기자를 위해 어제 충동구매한 채끝살을 구웠다. 먹으면서 함께 본 것은 <세계 테마 기행>의 스코틀랜드 편. 교양 있는 교수가 태풍이 몰아치는 역사 현장에 가서 현지인의 초대로 집에 가더니 딱딱한 빵과 멀건 수프를 대접받았다. 카메라와 함께 가는 초대에서  굳은 빵 대접을 받는 나라라니 스코틀랜드는 좀 생각해봐야 되는 여행지가 아닐까 싶었다. 

 밤에는 쓰레기도 버릴 겸 나가서 동네를 한 바퀴 둘러봤는데 꽤 큰 시장이 보였다. 밤이라 문은 닫았지만 주말에 구경하기 좋은 시장 같아 보였다. 마실을 끝내고 들어가서 오늘 최초이자 최후의 세수를 하고 집 근처로 와준 남자 친구를 만났다. 아까 마실 나갔을 때 본 대만 식당에 가서 만두와 탕수육과 칭따오를 시켰다. 재밌냐고 묻길래 생각보다 더 재밌다고 대답했다. 하루에 몇 끼를 먹는지 모르겠지만 집에 가면 친구가 있고 밖에 나오면 남자 친구가 있고 좋네. 집으로 와서 한 일은 뜨개질. 거실 스피커로 데미안 라이스 신보를 들으며 뜨개질을 했더니 와인이 마시고 싶길래 남은 와인을 열었다. 이때가 바로 유기자가 뜨개질에 입문한 시간이다. 유기자는 나름 손이 야무진 사람이라 코 만들기, 겉뜨기, 안뜨기를 가르쳤을 뿐인데 자투리 실을 써서 그럴싸한 화병 감싸개를 만들어냈다. 아까 낮에 동네에서 저렴이 꽃을 사서 물병에 꽂아뒀는데 화병 감싸개로 감싸니 아주 잘 어울렸다. 내일은 눈이 오고 추울 거라는데 집은 따뜻하고 아늑하다. 뜨개실로 감싸진 집을 생각하며 잠들었다. 



공동거주실험과 함께 시작한 나의 뜨개질 실험


지키지 못한 식단표와 화병 감싸개. 그리고 결국엔 다함께 하게 된 뜨개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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