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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난 Jan 12. 2019

내가 이 곳에 있을거야

길에서 배운 것

과거를 위해 미래를 포기한 도시.

론리플래닛에서는 로마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었다. 아주 멋진 표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머리 속으로는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을 상상했다. 유럽의 많은 도시들이 과거를 잘 보존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로마에 도착한 날, 론리플래닛 작가가 왜 그런 한 줄을 남겼는지 알게 됐다. 과거를 위해 미래를 포기한 도시는 많지만 로마만큼 화끈하게 포기한 도시는 없었다.

 잠깐 본 로마에는 새 것이 하나도 없었다. 놀라울 정도로 보이는 모든 것이 오래된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오래된 것들이 아주아주 거대한 규모로 남겨져 있었다. 오래된 것들을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 새로운 것들이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로마를 며칠 더 돌아다녀보면서 생각했다. 이 정도로 압도적인 과거를 가진 도시라면 어떤 미래도 두려울 것이 없을 것 같다고. 고작 몇십년 뒤에는 스마트폰도 그리고 나도 없겠지만 콜로세움은 이 자리에 그대로 있을 테니까. 고작 몇년 뒤에 지금 유행하는 모든 것들이 어린 누군가에게 무시당할 옛날의 것이 될테지만 그들도 로마를 여행할 테니까.
 로마에는 새 차도 거의 없었다. 새 차라기 보다는 성한 차가 거의 없었다. 언제 뽑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모든 차가 헤드라이트가 깨져있거나 모서리가 찌그러져있었고 뒷창문을 시원하게 날리고 비닐로 유리를 대신하기도 했다. 이 도시를 상처없이 건사하기 위해 아주 화끈하게 스스로를 희생해버린 차들이었다. 엉망이 되어버린 차를 보는 것에도 희열감이 있었다. 중요했던 가치가 전복되는 기분이었다. 차 주인의 마음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내 마음은 짜릿했다.

 로마에서 숙박을 하면 숙박료 외에 City Tax라는 것을 낸다. 1인당 1박에 3.5유로. 돈쓰는 여행자에게 세금을 내라는 것이 이상했는데 로마를 하루동안 돌아다니면서 알게 됐다. 이 도시에 거대하고 아름다운 공짜가 너무 많네. 수만년 전과 수천년 전 사이를 오가다가 커다란 무지개를 보고 파란밤을 보고 노래를 들었다. 이 도시에서는 다 공짜였다. 

 그래서 이번 이탈리아 여행의 시작과 끝은 로마였다. 섬을 한군데 더 가려던 계획을 로마로 바꿨다. 커다란 짐가방을 가지고 배와 버스를 갈아타야되는 여정이 귀찮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로마를 좀 더 보고싶었다. 그래서 뭘 봤냐고 묻는다면 사실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바티칸도 판테온도 보르게스 미술관도 로마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왜 안 봤냐면 무식했기 때문이다. 그런것들이 있는 줄을 몰랐다. 이탈리아 론리플래닛을 두권이나 봤지만 '로마는 과거를 위해 미래를 포기한 도시다' 라는 문장만 기억하고 있었지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몇걸음 걸을 때마다 느닷없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거대하고 오래된 구조물들에 크게 놀랐고 구글맵에서 현재 위치를 찍어보면 언젠가 한번 쯤 들어본 듯한 무슨 광장이었다가 무슨 성당이었다가 무슨 저택이었다가 그랬다. 아무런 정보 없이 오션스 일레븐을 본 기분이었다고 하는 것은 그때의 기분을 1%정도로 표현한 말이다. 왜 이런 대단한 곳에 사람들이 줄 서 있지 않아?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사람들은 더 대단한 콜로세움과 트레비 분수에 줄을 서고 있었다. 로마에서 유명해지기란 매우 어려운 미션으로 보였다. 실제로 보르게스 미술관 입장이 예매없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보르게스 공원을 가로질러 기웃거리며 국립현대미술관을 갔는데 그곳은 그야말로 한산했다. 잭슨폴락의 작품전을 하고 있었고 중간중간 마네와 모네, 샤갈, 클림프 등의 그림도 걸려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시실에는 나와 직원 둘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912년생의 현대미술의 거장 정도는 이 도시에서 연습생 정도의 위치가 아닌가 했다.

 무엇을 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루하루 차곡차곡 압도당하며 돌아다니다가 마지막 날, 커피를 사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커피가게에 들어갔다. 아주아주 평범한 길가에 있는 커피가게였고 처음 보는 브랜드였다. 부오나 세라! (저녁인사) 하고 들어가자 영어를 하는 직원을 데려다줬다. 시원시원하게 커피를 추천해주고 향이 궁금하다 말하자 시원시원하게 에스프레소 한잔을 내려주던 직원이 커피를 포장해서 건네주며 말했다.

"여기 내 명함도 넣었어. 언제라도 로마에 다시 돌아와서 이곳에 오면 내가 여기에 있을거야."

단골가게가 생길 수 없는 도시. 서너달에 한번씩 가게가 바뀌고 아무리 인기있는 가게라도 2년 후에는 사라지고야 마는 도시에서 살고 있는 나는 이런 해맑은 약속에도 압도당했다. 수년이 되든, 수십년이 되든, 수백년이 되든, 수천년이 되든 변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그 영원성이 주는 안정감. 과거를 위해 미래를 포기한 도시라 폄하되었지만 그것은 무엇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의 자신감이었다. 
이 도시가 주는 혜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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