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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난 Jul 10. 2019

이 책은 대단하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좋아하는 영화 <러스트 앤 본>에서 클럽 기도로 일하는 전직 복서 알리는 클럽에 놀러 온 스테파니를 보고 반한다. (반할 수밖에 없는 미모라 나도 반했다.) 얼마 후, 돌고래 조련사로 일하는 스테파니는 일을 하던 중 사고로 양쪽 다리가 절단된다. 마음과 몸 모두 고립된 채로 살아가던 스테파니는 알리에게 연락을 한다. 스테파니를 본 알리는 스테파니에게 여전히 성적 매력을 느낀다. 스테파니와 알리는 섹스하는 사이에서 파트너로 발전하고 이 관계를 통해 스테파니는 의족을 하고 세상에 다시 나설 힘을 얻는다.


알리의 이 상쾌하고 깔끔한 감정선과 행동을 보며 내가 가진 의문은 이것이었다.


알리에게는 어째서 스테파니의 장애가 장애물이 아닐까


영화를 다 보고 곰곰이 생각하면서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알리는 무식할 정도로 단순하게 스테파니와 섹스를 바랐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 외의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사고 후의 스테파니는 다리가 없을 뿐 섹스를 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으니까 한결같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알리는 스테파니에게


'여전히' 매력을 느낀 것이 아니라

'당연히' 매력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스테파니에게 다리를 잃은 사고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 모든 것이 (안 좋은 쪽으로) 바뀌는 최악의 경험이었기 때문에 이처럼 한결같은 마음으로 본인에게 뛰어드는 알리는 자존감과 용기를 회복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구구절절 이 영화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라는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김원영은 내가 이 영화를 보고 가졌던 거의 모든 질문에 답을 준다. 나의 질문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고 아주 우아하게 말해준다.




서로를 인격체로 존중하는 상호작용은 실재를 공유하면서 그 존중을 강화한다.



우리가 본래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서로를 대우한다기보다는 그렇게 서로를 대우할 때 비로소 존엄이 '구성된다'라고 말할 수 있다.



타인의 삶을 잘못되었다고 규정하고, 그로부터 위안을 얻는 사람들이야말로 어쩌면 이런 '정신승리'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몸의 볼품없는 어떤 특성, 나이 들고 병들고 장애를 가진 내 자녀의, 친구의, 연인의, 그리고 나의 몸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수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 정체성이라고 간주할 필요가 있다.



이 세상에 잘못된 삶이란 없다는 우리의 변론이 성공하려면, 정치 공동체 일반이 그것을 수용할 수 있음을 보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디보티즘*을 성적 도착이나 병리적 수준의 페티시즘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여성의 가슴이나 남성의 떡 벌어진 어깨에서 성적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취향을 두고 정신질환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검은색 스타킹을 보고 흥분하거나 팔뚝에 드러난 힘줄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취향을 이해하기 어렵거나 때로 불쾌하게 여기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정신질환자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왜 장애가 있는 신체에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것은 질환으로 분류되어야 할까?


*디보티란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사람들을 지칭하며, 이들이 장애에 대해 보이는 태도와 욕망을 ‘디보티즘’이라 부른다.



근육병과 골형성 부전증에 따라붙는 거창하고 낭만적인 운명 '서사시'에 매혹되어 종교적 감수성을 느낀다고 한들 이는 그 존재에 대한 사랑과는 관련이 없다. 몸을 욕망해야 한다. 종교나 도덕, 정치가 뭐라고 하든 너의 '신체'와 함께 하고 싶다는 선언이야말로 타인을 향한 욕망이고, 곧 사랑이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중 여러 페이지에서 발췌




알리는 스테파니도 수용하지 못했던 스테파니의 정체성을 수용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사고 전) 예쁘고 매력적인 여자에서

(사고 후) 예쁘고 매력적이고 다리가 없는 여자로

정체성을 변화시켜 수용했다.


대부분의 경우는 (나의 경우는 확실히)


(사고 전) 예쁘고 매력적인 여자에서

(사고 후) 안타깝게도 다리가 없지만 여전히 예쁘고 매력적인 장애인

정도의 범위에서 수용하지 않을까.


알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줄 때 스테파니는 타인과 자신에게 존중받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 수용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방법은 존중도 배려도 존경도 아니라 '몸을 욕망하는' 것이었다.


이 책에는 살면서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잔뜩 담겨있는데 그 모든 것이 사는데 꼭 필요한 이야기였다.

이 책은 너무 멋지고 동시에 이렇게 이 책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나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내가 그동안 필요 이상으로 후진 것은 아니었을까.


아름다움과 우아함에 대한 지치지 않는 욕망으로 오래도록 쌓아온 지식과 생각을 힘차게 써 내려간 책이다. 매우 유익하고 매우 재미있고 문체는 우아하고 전개는 박진감 터진다. 누구라도 붙잡고 떠들고 싶고 무엇인가 하고 싶게 만든다.


나는 이렇게도 묻고 싶어 진다.


스테파니는 만약 다리를 잃지 않았다면 알리를 파트너로 수용했을까. 알리의 '불안정한 직업'과 '가난'과 '싱글대디’라는 정체성이 장애물이 되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나는 궁금하다.

이 질문에는 또 얼마나 많은 잘못이 담겨있을까.

이 글은 얼마나 잘못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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