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는 중환자실에 누워 온갖 기계에 매달려 계시다 광복절에 돌아가셨다. 아흔다섯. 하지만 허리 통증 때문에 입원하시기 전, 그러니까 9개월 전만 하더라도 몹시 정정하셨던 분이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진다고 해서 가족과 함께 병원에 갔을 때 의사가 말했다. 이렇게 연세가 많으신 분이 이런 고된 치료과 오랜 병원생활에도 버티실 수 있는 것은 체력이 워낙 좋았기 때문이라고.
투석도 잘 되지 않아 온통 부은 얼굴과 몸, 오랫동안 콧줄을 달아놓아서 찢어져버린 코, 목에 넣을 호스를 고정시키기 위해 뽑아버린 아랫니 두 개, 굳어서 펴지지 않는 다리, 오랫동안 누워계셔서 생긴 욕창에도 불구하고 의식 없이 살아계신 모습을 보고 있자니 체력이 좋았던 것이 다행인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장례식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사촌언니와 나란히 앉아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참 고생을 많이 하셨다는 이야기를 하며 나는 속으로, 할아버지를 이렇게 붙잡아 뒀던 것이 가족 중 누구도 결정을 하지 못해서 생긴 끔찍하고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촌언니는 다르게 말했다.
"그래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던데 조금만 더 계시다 가시지. 얼마나 무서우셨을까."
고개를 돌려 말을 마친 사촌언니를 쳐다보며 처음으로 내가 틀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냥 할아버지를 보고 있기가 불편해서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겠구나. 할아버지는 죽는 것이 더 두려울 수도 있었는데.
조문객들이 오기 전, 둘이서 나란히 장례식장 앞 의자에 앉아있던 이 몇 분이 내가 할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이었다. 엄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 의식이 없는 할아버지에게 세례를 받게 했었는데 이유는 아마도 천주교식 장례를 치르고 싶어서였던 거 같다. 사흘 내내, 3남 2녀 자식들의 지인들과 친척들로 구성된 조문객들과 성당 사람들의 연도 행렬로 크고 넓은 장례식장은 채워졌다 비워졌다 다시 채워졌다 비워졌다를 반복했다. 어깨를 자꾸 툭툭 치면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빨리해라 기다려라 명령을 내리던 사람은 성당 연령회의 회장이라고 했는데 처음 보는 그분은 장례절차에 빠삭한 분이신지 앞장서 상주들을 통솔했다. 단 네 명의 천주교 신자와 다수의 비 천주교 신자로 구성된 상주들은 모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낯선 천주교식 장례절차에 따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성수를 뿌렸다 기도를 했다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했다.
손주들은 의식이 치러지지 않는 시간에는 음식을 나르고 치우고 다시 날랐다.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 수많은 손님들 사이에서 "이봐요", "여기요", "여기", "어이!"라고 불려지며 고기가 부족하다는 사람에게는 고기를, 맥주 말고 소주를 달라는 사람에게는 소주를, 빨리 치우고 여기 앉겠다는 사람에게는 자리를 내줬다. 우리가 검은 상복을 입고 있으니까 고인의 가족이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는데 '손님은 왕이다'라는 오랜 가르침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조문객의 다수가 정말 손님처럼 행동하는 것이 신기했다. 그 많은 조문객들 중에 "손녀신가 봐요" 랄지 "할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셨어요"라고 안부를 묻는 객은 안타깝게도 만나지 못했다.
상주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본인들의 손님을 챙기는 분들이 계셨다. 누구는 본인의 손님들이 나갈 때 야쿠르트를 하나씩 나눠주라고 하길래 한국야쿠르트 본사에 전화해서 야쿠르트 100개를 주문해뒀다가 손님들이 신발을 신으실 때 쟁반에 가득한 야쿠르트를 하나씩 챙겨드렸는데 손사래를 치며 그냥 나가시는 분들이 속출했다. 또 다른 상주는 본인 손님들이 곧 많이 올 테니 상 한열을 비워두라고 했다. 그래서 그 상에 앉으려는 다른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다른 손님을 대접하는 사이, 비워둔 자리에 앉아버린 손님들 때문에 싫은 소리를 듣기도 했다.
80평이라는 그 넓고 넓은 빈소의 그 수많은 검은 옷들 사이에서 커다랗고 지저분한 쟁반을 든 채 분절되지 않고 끝없이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이 하나씩 둘씩 엉키고 엉켜서 가슴이 답답해지자, 안 그래도 좁은 내 마음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사라져 버렸다. 상을 치른다는 것이 경박한 일이 되어버렸다.
외할아버지의 관은 컸다. 풍채가 좋은 분이시기도 했고 오랜 병상생활로 뼈가 굳어져서 다리를 곧게 펼 수 없어 관이 커졌다고 했다. 입관을 하기 몇 시간 전, 큰외삼촌은 갑자기 집에 다녀와야겠다며 황급히 신발을 신으셨다. 다들 왜 지금 갑자기 집에 가냐고 물어보자, 큰외삼촌이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병상에 계실 때 베토벤 시디와 함께 묻어달라고 말씀하셨어."
외할아버지는 음악과 미술을 몹시 좋아하셨던 분이었다. 명절 때 할아버지 댁에 가면 방에서 곱게 한복을 입으시고 소파에 다리를 척 하니 올리고 앉으셔서 잘 들리지 않는 귀로 볼륨을 한껏 높여 클래식을 듣고 계셨다. 벽에는 좋아하는 유화와 베토벤의 두상이 걸려있었다. 전시회도 여행도 좋아하셨는데 여든여덟 살에 가셨던 유럽여행에서 박물관에 그림을 보러 갔는데 큐레이터가 하도 작게 설명을 해서 못 들었다고 불만을 이야기하셨던 게 기억이 난다. 내가 대학시절 인도 여행을 다녀왔을 때에는 방으로 불러 세계전도 책에서 인도 부분을 펼쳐놓으시고 어디 어디를 가봤는지 손으로 짚으면서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셨었다. 내가 무릎을 꿇고 앉아 "뭄바이에서 이렇게 아그라로... 아그라에서는 타지마할을 봤고...아! 자이살메르에서는 사막에 갔었어요"라고 이야기를 하자, 주름이 가득한 얼굴 속 눈을 반짝이면서 "나도 꼭 인도를 가봐야겠다" 고 말씀하셨던 것도 기억이 난다.
최근에 본 글 중, 죽을 때 무엇을 가지고 가고 싶냐는 질문에 "꽃"이라고 대답한 노인에게 왜냐고 묻자 "오랜만에 마누라를 만나니까"라고 답한 것만큼 로맨틱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베토벤과 함께 묻히고 싶다"라고 말한 아흔다섯의 할아버지가 나는 멋지다고 생각했다. 평생 음악을 즐기시던 할아버지였는데 아들딸과 손주들 누구도 음악이나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없어 할아버지와 이런 것으로 소통을 하지 못했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야 비로소 할아버지가 어떤 음악을 들으셨는지 궁금해진 나는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서 큰외삼촌이 관에 시디를 넣으실 때 가까이 가서 봤는데 그것은 베토벤이 아니라 비발디와 모차르트였다. "아. 베토벤이 아닌데"라고 말을 하는 중에 시디 두장은 염을 하는 사람의 손에 넘어가 "케이스는 필요 없잖아요?"라는 연령회 회장님의 말에 케이스가 벗겨져 관 속으로 들어갔다. 큰외삼촌은 베토벤 시디를 찾지 못하셨나 보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베토벤 한 장 대신 비발디와 모차르트 두장을 가져오셨나 보다. 나는 나이 서른둘에 비로소, '비극과 희극은 한 장 차이'라는 격언의 의미를 체득하게 됐다.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 옆에 묻히셨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이미 다 환갑을 넘은 삼촌과 사위들의 기력으로는 운구가 벅차 보였는데도 연령회 회장님은 젊고 쌩쌩한 손자들에게는 영정사진과 위패만 들게 했다. 아직까지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성당의 가파른 계단을 걸어 관을 들고 들어가는데 그 모습이 위태로워 보여 나도 거들었는데 누군가 "관을 왜 이렇게 무거운 걸 했어?"라고 숨죽여 말했다.
그 외에도 이야기는 많다. 삼일 동안 서너 시간만 자고 깨어있었더니 깨어있는 시간만큼 이야기는 많아졌다. 하지만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인지는 모르겠다. 삼우제를 하는 날에는 아침 일찍 성당에서 미사를 하고 천안에 있는 산소로 간다고 했다. 엄마는 몹시 싫어했지만, 나는 미사에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한 시간만 혼자서 장례 내내 하지 못했던 할아버지를 애도하고 싶었다. 더 감정이 무뎌져 버려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남지 않게 돼버리기 전에 함께 나눴던 추억을 생각해보고 싶었다. 꽁한 손녀라서 명복을 빌지 못했지만 좋은 곳에 가시는 중이기를 빌고 싶었다. 오랜만에 외할머니도 만나시기를 기도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