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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난 Jul 01. 2019

Stop emotional bleeding


 기침이 심해서 회사 근처의 이비인후과에 갔더니 인후염이라고 했다. 약을 며칠 먹으면 괜찮아진다고 했는데 3일간 약을 먹고 또 이틀 치를 더 받아먹었는데도 기침은 점점 더 심해지기만 했다. 그런 중에 회사와 일상에서도 몇 가지 일이 마음을 깎아서 우울함도 찾아왔다. 꼭 이렇지. 동쪽에서 비가 오면 서쪽에서는 천둥이 쳐.


여전히 마음은 가라앉은 상태였지만 몸이라도 건강해지고 싶어서 병원을 바꿨다. 검색 끝에 동네 한중간 역사가 느껴지는 내과에 가서 또다시 처방을 받고 고기를 덩어리로 먹으라는 박력 있는 조언도 들었다. 고기를 먹고 약도 꼬박꼬박 먹었다.


또 일주일이 지났지만 이상할 정도로 기침은 여전하고 이제는 콧물까지 나오더니 어느 날부터인가는 숨을 쉬어도 냄새가 맡아지지 않았다.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되자 연쇄적으로 맛이 안 느껴져서 입에 뭘 넣고 씹어도 짠지 단지 모르게 됐다. 겁이 덜컥 났다. 어쩌지. 냄새 안 나. 어떡해. 몸의 이상은 우울함을 가속시켜 나는 몇 계단 더 아래로 내려가서 잡혔던 약속들을 취소하고 운동을 가지 않게 됐다. 퇴근 후에는 곧바로 집에 와서 양 손에 쥐고 있는 걱정거리들을 생각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또 다른 병원에 갔다. 조금 더 먼 곳의 조금 더 큰 이비인후과. 이번 의사는 알레르기가 생긴 것일 수 있으니 알레르기약을 처방해준다 했다. 인후염도 비염도 아니고 이번에 알레르기? 알레르기라면 대체 무엇에 대한 알레르기지?


알레르기 약을 먹으며 기침 4주 차를 맞이했다. 좋은 고기를 먹어도 고기 맛이 안나 고깃값이 아까워서 고기 먹는 일을 중단한 참이었다. 대신 점심시간에는 밥을 거르고 걷다가 울면서 일기를 썼다. 그때 즈음에 나한테서는 기침 소리와 함께 습한 우울의 냄새가 났을 텐데 나는 냄새를 못 맡는 사람이라서 자각할 수 없었다. 이게 다 코 때문이야!라는 확실한 마음이 들킬래 진지하게 코 전문 이비인후과를 검색해서 찾아가 후각 상실이 걱정돼서 왔다고 했더니 의사가 진지하게 “걱정이네요”라며 검사를 시작했다. 코 내시경이라는 것을 처음 받아봤는데 오싹할 정도로 코의 깊은 곳까지 가느다란 관을 넣었다가 뺀 의사는 “다행히 축농증이네요”라는 진단을 내렸다. 후각 상실에는 두 가지 원인, 신경손상과 염증이 있는데 신경손상의 경우 치료가 거의 힘들고 염증의 경우는 치료가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염증이라 다행인 거라고. 역시나 약을 한 움큼 처방받고 나왔다.


약을 먹은 지 이틀째가 되자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들어가면 샴푸 냄새도 나고 커피를 마시면 쓴 줄도 알겠다. 또 병원에 가서 콧물을 잔뜩 뽑고 왔더니 이제 기침도 끝물에 접어들었다. 코를 벌렁거리며 침대에 엎드려있다가 Ted를 하나 봤다.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였다. 자막도 있어서 아주 좋았다.

http://www.ted.com/talks/guy_winch_the_case_for_emotional_hygiene#t-513001

화자는 질문한다. 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신체에 손상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운다. 그래서 머리가 아프면 약을 먹고 손가락을 베면 밴드를 손에 감는 등 자신의 신체를 쉽고 당연하게 보살피며 산다. 하지만 여러분, 이상하지 않나요? 마음에 손상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있습니까? 불안할 때, 외로울 때, 거절당했을 때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알고 있나요? 팔에 피가 나면 당연히 피를 멈추게 하려고 노력하면서 왜 마음에 상처가 나면 왜 스스로 상처를 더 파고 파서 어디까지 팔 수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하나요? 마음의 피도 지혈해야 합니다. Stop emotional bleeding.

상당히 공감했고 눈물이 찔끔 났다. 앞서 구구절절 쓴 나의 병원 일지만 보더라도 감기, 콧물 등의 증상에는 병원을 네 군데나 쫓아다니면서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고 회복된 것을 눈으로 확인한 후에야 안심했으면서 동시에 찾아왔던 우울함에 대해서는 어떤 조치를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몸이 나으면 마음도 나아질 것이라 기대했다. 그래서 온갖 약을 털어먹으면서도 마음은 덮어두고 방치했다. 가라앉으면서 가라앉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마음인데! 왜 그랬을까. 몸은 몸 마음은 마음. 내가 마음을 전혀 보살피지 않았으니까 나을 리가 없는데도 왜 시간이 약이 될 것이라 스스로에게 돌팔이 처방을 내렸을까. 병원에 가는 것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서 왜 정신과에 들려볼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을까.


내가 정신과에 가지 않은 이유, 아니 가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이유가 그곳의 이름이 정신과이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봤다. 정신과는 '정신'을 다루는 곳이고 나는 우울한 것이지 '정신'이 아프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침을 한다고 암병동에 가고 싶지 않은 것처럼. 내과, 이비인후과, 외과, 정형외과가 있는 것처럼 정신과도 더 다양한 소분류를 가지고 운영이 된다면 어떨까.


김미진 불안과. 연세 우리들 외로움과. 시카고 분노과. 시청 힘찬 하루 무기력과.


무기력과는 환절기 내과처럼 항시 붐빌 것 같고 분노과에는 정형외과 의사처럼 다부진 체격의 의사가 앉아있을 것만 같다. 점심을 먹고 나와 불안과에서 상담을 한 후 처방전을 받아들고 나와서는 의료보험으로 4100원을 계산하고 약은 3200원 내고 타 온다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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