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부산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만난 스페인 친구가 있었다. 이름이 Nestor였는데 우리가 네스토, 네스또라고 부를 때마다 본인의 이름은 그게 아니라며 '네스또ㄹ'라고 고쳐주곤 했다. 스페인어의 굴리는 'R'발음이 어려운 나에겐 이 친구는 그냥 '네스또'였다. 그 후로 생전 연락 한번 안 하다가 스페인으로 들어가기 전, 네스또에게 SNS로 스페인에 갈 예정이라고 말하자 흔쾌히 자기 집에 와서 지내라고 말해주었다. 8년 만에 만난 친구는 멋진 턱수염도 그대로, 서투른 영어도 그대로였다. 8년 동안 잊고 지냈던 부산 봉사활동 구성원들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나오자 반가운 탄성을 질렀다. 우리가 함께했던 봉사활동 지역과 그때 팀 불화가 있었던 사건들까지 세세하게 다 기억하고 있는 이 친구의 기억력에 놀라며 추억에 잠겼다. 앞으로 4일간 머물면서 지낼 예정이었는데 자기 집처럼 생각하고 편하게 있으라는 말이 너무 고마웠다. 네스또 집에 머무는 동안 집에 남는 방이 없었기에 소파에서 지냈는데 침대같이 넓고 푹신해서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하루는 네스또가 내일 저녁에 열리는 음악 페스티벌에 같이 가자고 했다. 마드리드 시내를 혼자 돌아다니는 것이 너무나 따분했던 나였기에 당연히 좋다고 말했고 약속 날짜에 맞춰서 준비하고 있다가 일이 끝난 후 집에 온 네스또의 차를 타고 축제 현장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규모가 큰 축제라 사방에서 들려오는 함성과 음악 소리에 귀가 아플 정도였다. 네스또는 우리 이외에도 4명의 친구가 이미 도착해있다고 말하며 그 광란의 축제 속에서 친구들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워낙 사람이 많고 시끄러워서 친구들을 찾는 데에만 30분이 걸렸다. 드디어 만나게 된 친구 4명! 프랑스에서부터 매일 하던 비쥬(볼 키스 인사)가 습관이 된 덕분에 자연스럽게 그들과 볼 키스를 하면서 한 명 한 명 인사를 나누었다. 네스또 역시 친구들과 한 명씩 볼 키스를 하는데 마지막으로 인사하는 여자와는 볼이 아닌 입으로 뽀뽀를 하는 것이 내 눈에 포착됐다. 순간 당황하여 입을 맞추는 인사도 있는지 혼란스러웠다. 나중에 이야기를 하면서 알고 보니 그 여자는 네스또 와 6년간 사귀었던 전 여자 친구였고 이름은 라우라(Laura). 지금은 친구 사이로 지낸다고 했다. 헤어지고 나서 친구가 된 경우에는 이렇게 입으로 뽀뽀도 하는구나 싶어 이상하긴 했지만, 문화려니 하고 넘겼다.
축제가 끝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갈 시간, 우리는 서로 볼 인사를 나누며 만나서 반가웠다고 말한 후 헤어져 집으로 가기 위해 주차된 차량으로 걸어가는데 라우라가 우리를 따라와서 조수석에 자연스럽게 타는 것이 아닌가? 아마 라우라 집이 멀어 네스또가 그녀를 집 앞까지 태워다 주는 거겠지 생각하며 나도 뒷좌석에 올라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차는 네스또 집 앞에서 멈추었고 라우라를 포함한 우리 셋은 다 같이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어 어리둥절하게 물어보지도 못하고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다. 아마 시간이 너무 늦고 집이 멀어서 잠을 자고 아침에 일찍 나가겠지 생각하면서 '어라? 소파는 나 혼자 누우면 끝인데, 라우라를 어디에 재우지? 소파를 나눠서 써야지 뭐'라며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찰나, 라우라는 내게 잘 자라고 말한 후 네스또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헤어진 연인 사이라고 하더니 어떻게 침대를 공유해서 잘 수 있다는 말인지 도대체 이해가 안 됐다. 다음 날 아침, 네스또는 일찍 출근해서 없었고 어제 입었던 옷 그대로 방에서 나오는 라우리와 마주쳤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잘 잤냐고 물어보면서 너네 다시 사귀는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실례일 것 같아 꾹 참았다.
마드리드를 떠나는 마지막 날 네스또에게 스페인에서는 헤어진 연인과 친구가 되는 경우가 많냐고 물었고 네스또는 그런 편인 것 같다고 말했다. 내가 한국에서는 보통 헤어지면 그 연이 아예 끊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하자 네스또는 그게 더 신기하고 놀랍다는 듯 반응했다. 이렇게 서로의 문화 차이에 놀라며 공항으로 향했다. 아직도 그날 밤 일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정말 헤어진 연인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