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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했던 시간들, 그것으로 되었다.

미국 - 그랜드캐년 사우스림

by 너나나나

행복했던 시간, 그것으로 되었다.

미국, 그랜드 캐니언 사우스림 (Grand Canyon South Rim)

남자 친구와 함께하려고 며칠 전부터 예약하고 고대했던 그랜드 캐니언, 홀스슈 밴드, 엔탈롭 캐년 1박 2일 투어. 참가비는 이미 냈고 날짜가 임박했기 때문에 '저, 어제 헤어져서 못 갈 것 같으니까 환불받고 싶어요'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떤 이유로든 7일 전부터는 환급이 안 된다는 규정이 있어 어쩔 수 없이 혼자서 투어 길에 올랐고 끌려다니는 투어를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랜드 캐니언 투어는 생각보다 알차고 재밌었다. 가이드가 좋은 전망 포인트에 알아서 데려다주고, 숙식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으며, 까다롭기로 알려진 엔탈롭 캐년 예약을 내가 직접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1박 2일 일정에 팁 포함 인당 383달러(인당 한화 40만 원) 였는데 두 명분을 선급으로 미리 지급했었으니 남자 친구 없이 나 혼자 약 80만 원어치 1박 2일 투어에 온 셈이었다.

Grand Canyon?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지질학적 장관을 연출하며 1.5km로 깊게 팬 협곡 지대는 너비가 500m에서 30km에 이른다. 445km를 구불구불 돌아가는 협곡은 융기된 지각 위에서 6백만 년 동안 지질학적 활동과 콜로라도강에 의한 침식으로 형성된 곳이다. 협곡에 노출된 수평 단층들은 20억 년에 걸친 역동적인 지각 활동의 역사로서 크게 4개의 지질 시대를 보여준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리나라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거리만큼 협곡이 이어져 광활하고 광범위한 규모를 자랑하는 그랜드 캐니언은 크게 동서남북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융기가 진행 중인 이 지대는 단면을 조금 더 자세히 보면 색이 다르고 경계선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색이 다른 각각의 지층은 약 1억 년을 의미하기 때문에 총 20개의 층을 가진 그랜드 캐니언의 나이는 약 20억 살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수많은 지질학자가 지금 현재도 실제로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연구를 지속하고 있으며 그랜드 캐니언은 살아있는 지구의 산증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South Rim에서 보는 풍경은 건너편에 있는 North Rim의 단조로운 단면 지층을 바라보는 일로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날에는 오히려 더 비현실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구름이 많이 껴야 현실감과 입체감이 살아나 더 멋지다고 한다. 내가 갔을 때는 구름 한 점 없었는데 왜 구름이 필요한지는 사진을 보고서야 알았다. 사진 속 배경이 마치 사진관에서 CG를 넣어 찍은 것처럼 평면적이라 규모와 장엄함이 사진으로는 잘 와 닿지 않는다.

첫째 날, 저녁. 1박 2일 투어를 함께하고 있는 8명의 다른 한국인들과 함께 야영장에서 삼겹살 파티를 열었다. 여행을 시작하고 제대로 된 삼겹살이 너무 오랜만이라 정신없이 먹던 중, 가이드가 내게 문득 2명분을 예약을 했는데 어쩌다가 혼자 오게 되었냐고 물었고 바로 어제 헤어져서 돈이 아까워, 나 혼자라도 왔다고 대답했다. 이 사연을 듣고 있던 다른 일행들이 연민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괜찮다고 그럴 수도 있다며 잘 왔다고 다독여주었다. 혼자 왔기에 사람들은 나를 더 잘 챙겨주었고 덕분에 금세 친해져서 잘 어울릴 수 있었다.

대자연의 거대한 장관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걱정과 근심들은 사실 인생을 좌지우지할만한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헤어짐으로 인해 여행을 중단하거나 풀이 죽어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여행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대자연을 보며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내 눈앞에 있는 대자연은 내게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네가 할 수 있는 한 큰마음을 가져라, 큰 그릇이 되어야 큰 사람을 담을 수 있다' 20억 년이라는 무한의 시간 동안 형성된 지층들과 절경들이 무한의 인내로 빚어진 결과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니. 100년 밖에 살지 못하는 인간의 인생이 너무나 짧게 느껴졌다.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조바심 내지 않으며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면서 행복하면 된다. 이미 지나간 나쁜 것들에 연연하지 말고 새로 다가오는 것을 즐기고 건강을 유지한다면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 100년보다 더욱 참된 시간이 될 것이다.

홀스슈 밴드 (Horseshoe Bend)

둘째 날 아침, 홀스슈 밴드로 먼저 향했다. 우리는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5시에 야영장에서 출발했다. 말발굽 모양으로 휘돌아가는 콜로라도의 강을 보고 있자니 정말로 경이로웠다. 어쩜 이렇게 절묘한 모양으로 거대하게 자연이 형성되었는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엔탈롭 캐년 (Antelope Canyon)

윈도 바탕화면으로 유명한 이곳은 인디언들이 직접 내부 가이드를 하고 있으며 자연보전을 위해 한 번에 너무 많은 관광객을 받지 않고 예약제로 한정적인 인원만 받고 있다. 입장을 위해서는 몇 가지 규칙이 있는데,


-인디언 가이드 대동 필수.

-협곡 안에 들어가서 암벽등반을 하거나 글씨를 쓰는 행동 금지.

-셀카봉, 삼각대, 고프로 금지. 카메라 촬영은 가능.


고프로나 드론을 띄워서 촬영을 한 후 인터넷에 올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진만 허용한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줄을 서서 보고 싶어서 하는 곳 엔탈롭 캐년은 예약을 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고 한다. 그러니 가치 보존을 위해 요구되는 사항들을 잘 따라주어야 한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데 상당히 가파르고 폭이 좁으니 조심해서 천천히 내려가고. 계단을 오르고 내릴 때는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이 금지되어있으니 항상 넘어지거나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들어가자마자 말로만 듣던 윈도 배경화면이 눈앞에 펼쳐졌는데 주황빛 도는 이곳에 노란 햇빛이 들어오면서 더 밝고 예쁜 색을 내고 있었다. 그림자의 명암 덕분에 다양한 색채가 존재함과 동시에 입체적, 자연적으로 형성된 이 말도 안 되는 신비의 세계 속에서 지구가 아닌 완전히 다른 세상에 온 느낌이었다. 비가 올 때마다 지반이 침식 작용을 하면서 끊임없이 이 협곡은 깊어져 가는데 사람 손으로 만지는 촉감은 아기 살을 만지듯 부드러웠고 예술가가 빗어낸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이후 모든 투어 일정을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았다던 날, 의도치 않게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한 편의 드라마를 찍고 온 느낌이 들었다. 안타까운 이별 후 홀로 여행을 하는 상황에서도 속절없이 대자연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내 눈에 더 예쁘고 더 멋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함께 했던 많은 약속, 미래를 함께하자는 말들과 너 죽으면 나도 죽겠다는 허무맹랑한 말들까지 모든 추억과 기억들을 이곳에 묻으려 한다.

괜찮다. 찬란했던 20대, 행복했던 시간, 그것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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