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의 반죽기와 오븐은 아마 느긋하게 은퇴를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운 좋게 주인의 변덕으로 일없이 간간히 전자레인지의 기능을 수행하는 오븐과 식빵 굽기라는 누워서 빵 먹기인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에 일없이 놀고 있던 반죽기나 8년이 넘어서 이렇게 맹렬하게 일하는 신세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 하였으리라. 그런 걸로 치자면 역시 싱크대 아래에서 놀고 있던 핸드믹서도 할 말이 많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어느 날 생기는 쓸모
단지 집에서 필요 없는 것을 정리하여 버리고 조금 위치를 찾아주었을 뿐인데, 요리하기가 편해져 반죽도 치고 케이크도 굽고 쿠키도 굽게 되었다.
예전엔 괜히 완벽주의를 추구해서 이스트는 생 이스트가 아니면 쓰지 않으리라 했던 욕심도 버리고 편하게 건조 드라이 이스트를 쓰기도 하고, 사과파이를 굽기도 하고, 레시피를 보다가 맛이 궁금해서 해보고 싶었던 캐러멜 바나나 파운드케이크도 만들기도 했다.
욕심을 조금 버렸더니, 할 수 있는 게 많아졌다. 몸에 걸치고 있던 과분한 욕심들을 하나씩 버리는 나는 앞으로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만약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상황에 꼭꼭 묶여있다면 완벽하기 위해 짊어진 무언가를 조금씩 내려놓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아 그렇다고 최후의 최후까지 놓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절대로 놓지 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