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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노 Sep 06. 2017

예술을 소유하는 그 아찔한 첫 경험에 대하여

내 사랑에 나는 얼마를 지불할 수 있나요


경험해보지 않으면 그건 정말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누군가 말했던 것 같다


모든 일은 비슷하다. 알거나, 듣거나, 배운 것보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 한번 본 것이 낫다. 사람을 구할 때 경력자를 구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해보지 않았다면 결코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심오함이 경험에는 있다. 그것은 인수인계나 교육으로도 전할 수 없는 몸이 체득한 무엇이다.


나름 소비의 프로페셔널이라 자부했던 나도 그림을 구매하고 소장하는 행위는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도 예전 직장의 동료의 아내분이 갤러리 운영자이시기도 했고, 그 까닭에 그 동료분이 개인적으로 소장한 작품들이 꽤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잘 알지 못하는 작가들의 이름과 대표작을 외우거나 그 작가가 얼마나 몸값이 뛰었는지 혹은 얼마나 작품이 신선한지 이해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전시회를 기획한 큐레이터분이 개인 소장하고 싶었던 작품을 국립현대미술관이 먼저 소장해버린 아쉬움을 토로하며 이야기하실 때에도 큐레이터분들은 워낙 이 세계를 잘 아시니까 그럴 수도 있으시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오늘 이 글은 일반인이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하지만, 인생에서 처음으로 작품을 구매한 소시민의 경험을 그 날의 생생한 시각으로 담아보았다. 작품을 구매한 기회를 제공해주신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을 해외 여행자들에게 알린다는 야심 찬 꿈을 가진 회사 ArtTrip이 주최한 하우스 아트 페어라는 행사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려고 한다.

*이 글이 그림 구매를 고민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적어본다.


김민기 작가님과 콜라보가 진행되었던 우&우

 개인적인 경험의 배경을 좀 더 자세히 풀어보자면 작년에 ArtTrip이 진행한 아트 X스테이를 통해 예술에 대해 관심이 생겼었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과 비슷하기도 하고 좀 더 배워두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올해 국립 현대미술관 평가단 활동을 시작했고, 특별한 자리를 통해 전시를 기획하신 큐레이터분들의 설명을 들으며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근현대미술사 아카데미에서 한국의 모더니티 수업을 10주 동안 들으면서 한국 작가들에 대해 무지했던 내가 반짝반짝 새롭게 한국 작가들의 가치를 인정한 것도 큰 변화였다. 아마 이런 활동들이 심미안을 높여주고 작품을 가치를 인정해 소유하는 것에 대한 마음의 허들을 낮춰주었는지도 모르겠다.



평소에 나는 예술이란 미술관에 있는 것들이 가장 좋은 것들이며, 좋은 것을 보고 싶다면 미술관으로 가면 된다 라고 생각해왔다. 그런 내가 미술관의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은 '가지고 싶고, 내 집에 두고 싶은 작품인지' 같은 소박한 기준들이었다. 그중에 가장 내가 소장하고 싶었던 작품은 오원 장승업의 홍백매도 십곡병였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그런 대단한 작품을 소장할 수 있을까. 소장하더라도 보관이 더 까다로울 것은 당연하고, 조명이나 변변찮은 공간이 없는 내게 홍백매도는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나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러니 나는 그 순간 내가 받은 감흥과 감동이 옥구슬처럼 쉽게 깨어지거나, 조금의 흠이라도 생길까 아껴왔다. 하지만 만약 내가 그때 그 홍백매도를 경제적 곤궁을 겪더라도 구매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 따위 당연히 할 수가 없었다. 작품을 향한 짧은 짝사랑은 매화 병풍이 까만 공간 안에서 매화꽃을 하얗게 피워낸 모습을 폐관 시간이 가깝도록 지켜본 것으로 끝내야 했다.



그 뒤로 나의 지적인 호기심과 취향을 만족시키는 예술은 실제로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관객 참여형 예술에 더 가까웠다. 그렇다 보니 소유, 소장의 개념이 옅어지고 한동안 '애호'하고 싶다는 것을 잊었던 것 같다. 콜렉터의 세계에 나는 선을 긋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견고한 선을 왜 나는 단숨에 뛰어넘게 된 것일까?

아쉽게도 이 글은 예술을 투자의 대상으로 보는 분들에게 적합한 글은 아닐 것 같다. 그러나 정말 사고 싶은 작품이 있는데, 주변에서 이해해주는 이가 없어 힘들고 외롭고 자신이 미쳐버린 것은 아닐까 고심하는 분들에게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이 여기 있고 또 결심한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를 공유하고 싶다.



문승연 작가님의 작품들이 걸려있는 방으로 들어섰을 때 내가 받았던 인상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작가님이 사용하시는 컬러톤은 마음에 들었지만, 동물 혹은 곤충과 혼재되어 있는 눈이 크고 이마가 넓은 인물화라니 딱 사람들의 입맛에 맞춘 작품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승연 작가님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화첩을 뒤적이면서 작품에 녹아든 작가님의 생각과 표현방식에 공감할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하지만 그림을 살 생각도 전혀 없었고, 방 안에 걸린 그림 중 소장하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그대로 1층으로 내려가 행사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프리 드링크를 한 병 마시고 자리를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고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1층 소파에서 문승연 작가님과 단둘이 앉아 도란도란 작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방금 방에서 봤던 작품들 중에는 원하던 느낌의 그림이 없었다고, 나는 눈 화장이 예쁜 아이가 가지고 싶다고 이야기했더니 작가님은 반색하며 자신의 핸드폰에서 이 작품의 눈 화장이 예쁘다며 그림을 하나 보여주셨다. 그게 바로 블루 버터플라이였다. 작가님은 마침 이 작품은 바로 보여줄 수 있다며, 창고에 있는데 꺼내볼까요? 하고 창고에 가서 바로 이 작품을 꺼내 주셨다.



어두운 창고에서 꺼내진 작품은 거실로 나와 자연광을 받자 더 화사하게 보였다. 길에서 우연히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만났다면 꼭 그런 기분일지도 모르겠다. 초승달이 든 커다란 커피잔을 든 아이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정원수 잎사귀들은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 같았고, 소녀의 등에 돋아난 나비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세룰리안 블루에서 시안으로 그리고 청명한 가을 하늘 같은 하늘빛을 띄고 있었다. 밤하늘을 닮은 나비 날개 한 구석에는 조그마한 달이 떠 있었다.

작가님이 이 아이의 등에 돋아난 날개는 소녀의 등에 앉아있는 것일 수도 있고, 소녀의 몸에서 막 탈피를 끝낸 나비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탈피를 표현하기 위해 소녀의 드레스가 투명한 것이라고도 했다. 잔 속에 폭 빠진 유려한 달과, 차분한 녹색의 잎사귀에 둘러싸인 하얀 소녀의 투명하게 푸른 시선이 좋았다. 그 어떤 동물이나 곤충이 아닌 나비라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가격을 듣고 난 후에는 몸에 식은땀이 났다. 내가 저 작품을 소장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가격이 한 달 월급 정도였다. 평소라면 그냥 어휴 너무 비싸네요 하고 평온하게 자리를 떠날 수 있었을 텐데 '참 예쁘죠?'하고 묻는 작가님의 물음에 '정말 예쁘네요.'라고 대답한 것이 시작이었을까. 누군가 무심하게 작품을 스쳐 지나갈 때면 작품이 다칠까 내 마음이 다 조마조마했다. 얼른 누가 포장을 다시 싸서 다시 창고에 넣어준다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포장되어 얼른 눈 앞에서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과 반대로, 블루 버터플라이가 소박한 아이보리빛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사진을 찍는 내 머리 위에 걸려있는 풍경과 내가 꿈꾸는 미래의 곳곳에서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블루 버터플라이와 함께하는 내 모습이 또렷하게 이미지로 떠올랐다. 작가의 이름, 이후의 작품의 전망, 작가의 대표작, 비싸게 팔리는 그림의 특징? 그런 콜렉터로써의 이성은 멀리 날아가버렸다. 하루정도 더 고민해볼까 싶었지만 그건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다시 돌아올 테니 꼭 기다려달라는 부질없는 약속처럼 느껴졌다. 그림을 사기까지 한 시간이 넘도록 식은땀을 흘리며 폰을 볼 생각도 못하고 내가 저질러둔 소소한 소비 행각을 다시 반추하며 과거의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반성하고 미래의 금전 상황을 계산하며 천국과 지옥을 넘나들었다. 매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이 그림이 내 앞에 있을 그 모습이 아른거려 포기할 수가 없었다. 점차 나는 내 미래에 이 그림이 정말 잘 어울릴 거라는 그런 묘한 기대감과 확신이 차올라 울렁거리고 식은땀이 났다.

얼마나 기력을 소모했던지 몸이 후들거렸다. 기운이 순식간에 다 빠져나간 것처럼 탈진한 상태로 소파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마시고, 운동하며 먹으려 했던 견과류 한봉을 떨리는 손으로 겨우 입에 털어 넣고, 그 모습을 본 지인이 가져다준 캐러멜도 모조리 먹어버렸다. 어떻게든 먹고 힘을 내고 정신을 차려야 할 때였다.

그 당시에는 필사적으로 현재의 내 자금 사정을 계산해보느라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옆에서 작가님은 매년 자신의 그림 가격이 오르고 있고, 구매해두면 좋을 거라고 열심히 이야기해주셨다. 심지어 이 하우스 아트 페어 이후에는 바로 홍콩에서 전시를 할 거라며 이야기해주셨는데, 당시에는 몰랐지만 작가가 해외에서 전시를 하면 할수록 가격이 오르는 것이 미술 매매 시장의 상식이라고 한다. 그러니 작가님은 내게 최선을 다해 자기 어필을 해주신 것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책 중에 뷰티풀 몬스터라는 에세이집이 있다. 그 책의 작가인 김경 작가님을 나는 무척 좋아한다. 하여간 그 책의 꼭지 중에 '프라다 백보다 싼 팝 아트 한 점'이라는 글이 있다. 그 글에서 가장 약빨이 오래가는 쇼핑이라며 추천한 것은 바로 작품 쇼핑이었는데, 작품을 구입할 당시에는 생각해보지 못했지만 어느새 나도 명품백과 가격을 견주어보며 작품을 살 결심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구나 싶어 뒤늦게 감개무량해졌다.

나는 예전부터 '부'라는 조건과는 별개로 작품을 소장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 같다. 다만 내가 기꺼이까지는 아니어도 꽤나 큰 여유를 포기할 만큼 마음이 가는 작품을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번이 지독하게 운이 좋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한눈에 사랑하게 되는 것, 그 순간을 모두가 기다리지만 쉽게 그 순간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린 너무 잘 알고 있다. 게다가 그 상대가 그림이라서, 작품이라서, 조건 없이 오로지 돈만으로 소유할 수 있다는 것도 반대로 생각하면 기적 같은 일이다. 그렇게 반한 상대가 이미 다른 누군가의 소유일 때의 괴로움을 우린 다들 알고 있으니까.

만약 이 작품이 한 달 정도 무리하면 구매할 수 있는 가격이었다면 어땠을까 가정해본다. (이미 작품을 구입했으니까) 그래도 나는 구매했을 것 같다. 대신 좀 덜 고민하고, 덜 아팠겠지. 짝사랑의 감정을 강렬하게 응축한 것 같은 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을 것 같다. 내가 누릴 수 있었던 여유와 물질을 포기하고 내가 빠져든 무언가를 위해 커다란 희생을 하겠다 마음먹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하루가 지나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진지하게 고민을 해 보았다.


사랑하니까 다른 걸 포기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보면 하루가 행복하고, 내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주며, 함께 할 미래를 꿈꾸게 만드는 그런 존재를 우린 사랑한다고 표현한다. 내가 구매한 작품은 내게 그런 의미였다. 매일 아침 눈을 떠서 보이면 날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나를 채워주며, 나를 표현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도와주는, 함께 하고 싶은 존재. 그렇게 매일 교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지금 누군가 내게 왜 예술을 소장하고자 하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는 건, 억만금이 있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그래도 내가 첫 작품을 수월하게 구매할 수 있었던 것은 내 마음가짐이나 경제사정과는 별개로 작가님이 배려를 많이 해주신 부분과 ArtTrip 대표님과 직원분들이 콜렉터의 길로 막 발을 디딘 병아리를 어여삐 보아준 덕분이다. 결제를 마치면 작품 보증서와 함께 작품을 인계받을 수 있는데, 문승연 작가님의 배려로 디렉터님이 직접 작품을 가지고 오셔서 집에 설치해주시기로 했다. 그건 또 다음 기회에 적어볼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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