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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노 Oct 02. 2017

화가 나고 우울할 때 왜 그녀들은
브라우니를 구웠을까


추석 긴 연휴

답답하고 화가 나는 상황이 찾아올 거라 예상하지 못해서 더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어제 한껏 자유로웠던 기분은 아버지와의 입씨름을 통해 한껏 저조해졌다. 이번 연휴는 집에서 내리 보내겠다고 결심한 것만큼이나 곱절로 우울해져 나는 속절없이 침대 위의 굼벵이처럼 잠을 잤다.


차라리 회사라도 출근했다면 이 기분이 나아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스트레스에 어깨는 뭉치고 머리는 무거웠다. 화가 났고, 답답했고, 그럼에도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 속상했다.


꿍쳐놓은 초콜릿이 생각났다, 오사카 여행 내내 들고 다닌 다크 판 초콜릿인데 결국 못 먹고 가져와서 제과용으로나 써야지 하고 추석 연휴만 꼬박 기다렸던 초콜릿이다. 자허토르테를 만들까 하다가, 그냥 브라우니를 굽기로 했다. 속은 쫀득찐득하고 겉은 바삭한 다디단 브라우니.


내가 가지고 있는 레시피는 넛츠 류가 많이 들어가는 레시피라서 간단한 브라우니 레시피로 슬쩍 인터넷 서치를 해봤다. 나는 해외 거주하시는 전업주부 분들의 레시피를 곧잘 참고하는 편인데, 일단 해외 거주하시는 분들의 레시피는 해외 제과 레시피인 경우가 많고 국내외 다양한 제과 제품을 섭렵해 드셔 보신 분들이기에 스펙트럼이 넓다. 내가 참고한 레시피는 아래와 같다.



초콜릿 츄이 브라우니 


다크 초콜릿 113g

버터 113g

설탕 250g

달걀 2개

소금 4분의 1 작은술

바닐라 1 작은술

중력분 60g


---


다크 초콜릿은 노브랜드 다크 판 초콜릿

버터는 루어팍 무염 버터

중력분이 없어서 원래 이러면 안 되지만 강력분/박력분 반반 섞고

바닐라 1 작은술은 바닐라빈 설탕으로 대체했다.



만드는 방법은 무지 쉽다. 일단 버터와 초콜릿은 중탕을 하든 전자레인지에 돌리든 해서 녹여서 잘 섞어둔다.

그리고 계란에 설탕을 모조리 다 때려 넣고 휘퍼로 계속 저어서 반죽이 노오란 크림색이 되고 휘퍼로 들어 올렸을 때 반죽 위에 반죽이 떨어지면서 띠 모양이 남을 때까지 설탕을 녹여준다.

계란에 설탕을 녹이는 동안 단 냄새가 솔솔 나면서 어깨와 손목 그리고 팔의 근육이 뜨끈뜨끈해진다. 끈적한 설탕의 단내를 맡으며 반죽이 완성될 때까지 휘퍼를 저어 주다 보면 날 우울하게 했던 상념들이 뭔가 싶다. 기계로 하면 훨씬 쉽지만, 우울할 때는 몸을 움직이는 것이 제격이라. 브라우니에서 이 과정을 빼면 어려울 것도 하나 없다. 설탕이 묵직하게 계란에 녹아드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이 정도면 되었지 싶다가도 설탕의 입자가 작을수록 맛이 좋다는 그 말에 한껏 분노와 짜증을 담아 휘퍼질을 해주다가 또 지쳤다가 한다.

직접 계량해보시면 알 텐데, 계란 2개에 설탕 250g은 계란이 애처로워 보일 정도로 설탕이 엄청나게 많다. 계란 하나에 60g쯤 하니 계란의 2배쯤 되는 설탕을 섞이라고 휘젓고 있는 셈이다. 절대로 안 녹을 것 같으면서도 녹아서 점점 작아지는 설탕 알갱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사 안 풀릴 응어리가 있겠냐 싶지만 설탕 알갱이들은 어떻게든 남아있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감정의 응어리를 감자 뿌리처럼 주렁주렁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여러분 이상한 사람은 여러분들의 정신 건강에 해롭습니다. 그런 사람은 얼른 피해버리고 집에서 브라우니나 구워 먹는 게 훨씬 좋아요.


노란 반죽이 잘 완성되었다 싶으면, 거기에 녹은 버터와 초콜릿을 섞어준다. 반죽이 버터로 윤기 있게 빛나면서 초콜릿 빛으로 변하는 그 광경은 이제까지의 노고를 치하해주는 것만 같아 마음이 뿌듯해진다. 거기에 색이 더 나라고 카카오 파우더를 섞어주면 소소한 만족을 추가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소금도 넣어주면 된다. 단 맛을 부각시켜주기 위한 짠맛이라 적당히. 많이 넣어도 어차피 달다. 그다음은 밀가루를 하얀 가루가 안 보일 정도로 잘 섞은 다음에 유산지를 깔아 둔 팬에 팬닝 한다. 팬의 크기에 비해 반죽량이 적어서 순간 당황했지만 어쩔 수 없으니 얇게 팬닝 한다. 안되면 쵸콜릿 쿠키 대신 집어먹으면 되겠거니.



175도 오븐에 25-30분 구워야 하는데, 굽다가 상태를 보니 이상해서 오븐을 보니까... 15분 정도 스팀오븐으로 굽고 있었다. 반죽 윗면이 바삭한 게 목표니까 다시 오븐으로 바꿔서 15분 정도 더 구워준다. 그리고 가운데 부분을 젓가락으로 찔러서 반죽이 살짝 쫀득하게 묻어 나오면 꺼내서 식혀준다.


이렇게 허튼짓을 많이 했지만 구워져 나온 브라우니는 완벽한 크러스트와 찐득한 반죽이... 너무 맛있다. 먹자마자 과도한 당 섭취로 몸이 조금 덜덜 떨리는 게 부작용이긴 하지만, 뇌에 설탕 폭탄이 투여되자마자 기분이 좋아졌다. 브라우니는 애초에 너무 바짝 굽지만 않으면 망하기 힘든 레시피이기도 하고, 만들기도 쉽다. 엉망인 기분으로 만들어도 실패하기 힘든 레시피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니 영화와 소설의 여주인공들이 우울할 때면 브라우니를 구운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찐득한 그 단맛이 뇌를 마비시키는, 만들기 쉽고 단순한 레시피. 짤주머니를 모양을 내줘야 하는 것도 아니고, 모양 틀에 담아 구워야 하는 것도 아닌 그냥 반죽을 탁탁 네모난 팬에 털어버리면 그 이후는 오븐에 온전히 맡기면 되는 아주아주 사랑스러운. 이대로 먹기에 뭔가 아쉽다면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한 스쿱 떠서 올리면 완벽해진다. 완벽한 다이어트 학살자.



맛있게 구워져 나온 브라우니에 흐뭇하고 그 맛에 흐뭇해하다 보니 설탕이 녹아내리듯 응어리도 녹아내렸다.

긴 연휴 소소한 짜증에 흔들리지 않고 즐겁게 보내야지.




더 자세한 레시피와 방법은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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