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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노 Oct 30. 2016

야간열차 침대칸에서

핀란드 야간열차


나에게는 긴 밤을 가로지르는 야간열차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서울에서는 아무리 달려도 부산이 끝이지만, 유럽은 국경을 넘어 끝없이 달린다. 철도가 막 놓였을 무렵에는 긴 여행을 위해 며칠 밤 정도는 기차 침대칸에서 보내는 것이 예사였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에서는 열차의 1등석 침대칸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유년기를 함께했던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 덕분에 야간열차 침대칸으로 하는 여행은 내게 어떤 유럽 여행 방법보다 고풍스럽고 호사스러운 방법이라 생각되어졌다. 지금이야 이동과 숙박을 동시에 해결하기에 좋은 합리적인 젊은이들의 여행 수단이지만, 비싼 건 사실이다. 특히나 크리스마스 시즌의 2층 캐빈의 침대 객실은 샤워실까지 붙어있어 더더욱 비쌌다. 미리 예약하면 저렴하다던데, 나는 없는 자리를 만들어서라도 예약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12월 26일 로바니에미에서부터 헬싱키까지, 그야말로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핫한 시즌의 핫한 루트인 것이다.


로바니에미부터 헬싱키까지
처음 루트 검색시에 침대칸 가격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가격이 2배로 뛰었다. 기본적으로 엄청 저렴하게 잡는다면 이동에 49유로(한화 6만 원가량) 정도밖에 들지 않았겠지만 144.9유로(한화 18만 원)에 평소 가격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비싼 침대칸을 결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제일 비싼 샤워실 딸린 침대칸. 샤워실이 객실 내에 없는 침대칸을 예약하고 싶었지만 남자랑 같이 잘 수는 없었기에 그냥 눈물을 머금고 예약했다.

핀란드 철도 VR 사이트 : https://www.vr.fi/cs/vr/en/frontpage




VR 예약 순서


1. 루트, 날짜, 원하는 조건을 넣어서 검색한다.

2. 나오는 시간과 환승 조건을 살피고 원하는 열차 편을 고른다.

3. 좌석에 앉을 것인지, 침대칸을 이용할 것인지 고른다.

4. 앉을 좌석을 최종 확정하고 결제한다. ( 여기서 최종 금액 확인 )

5. 이메일로 받은 열차 티켓을 인쇄하거나 QR코드를 캡처하여 가지고 열차에 탑승한다.


좌석을 고르는 과정, 원하는 좌석 체크 후에 Save selected를 클릭하면 된다. NEXT CAR를 클릭해 꼼꼼히 살펴보기!





내 일정 중에 베르겐 에어비앤비를 제외하면 일정 중에 이 야간열차가 제일 비쌌다. 하지만 숙박과 이동이 동시에 해결된다는 매우 긍정적인 측면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이 것은 매우 합리적인 결제라며 자기 세뇌를 하곤 했다. 사실 이 열차가 아니면 내가 로바니에미를 12월 26일에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딱히 없었고 게다가 나는 2주라는 시간 동안 철새처럼 북유럽 4국을 이동하는 여행자였기에 철도 패스 같은 건 꿈같은 이야기였다. 노르웨지안 항공 패스가 있다면 결제했겠지만. 그러니 가능하다면 나처럼 무식하게 야간열차를 결제할 필요는 없다.



야니의 기차의 식당칸은 맛도 없고 비싼 데다가 붐빈다는 선견지명으로 미리 들린 로바니에미의 슈퍼에서 야간열차에서 먹을 먹거리를 잔뜩 산 다음 열차에 올랐다. 내가 하룻밤 지낼 객실에는 침대 아랫칸을 예약한 다른 사람이 있었다. 거기서 싱가포르에서 왔다는 Angela Tay를 만났는데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곧 우리는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우선 여행을 좋아해서 오로라를 보러 북유럽까지 혼자 온 흔치 않은 아시아 여자라는 점과 우리 둘이 똑같은 유니클로 집업을 가지고 있다는 우연이 겹쳐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핀란드에서 같은 유니클로 집업을 입은 아시아인을 같은 기차 칸 객실에서 만날 확률을 생각한다면 정말 놀라운 일이다!) 저녁을 먹으러 식당칸에 간 Angela가 사람이 너무 많아서 포기하고 돌아와서 내가 사 온 먹거리를 같이 나눠 먹으며 더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야니의 외할머니가 주신 크리스마스 햄과 게살 마요네즈 샐러드, 막 구워져 나온 호밀빵, 중국식 볶음국수 등을 놓고 우리는 서툰 영어로 서로의 여행 이야기를 했다. 이 때서야 보름달이 뜨는 시기에는 오로라를 보기 힘들다는 이야기도 알 수 있었고, 북유럽 예약은 적어도 6개월 전부터 준비해야 한다는 것도 Angela에서 들었다.



함께 북유럽 여행을 오기로 했던 Angela의 친구는 친척의 결혼식이 여행 일정 초반에 잡히는 바람에 원래는 결혼식에 불참하고 여행을 오려고 했으나 집안의 큰 어른이신 할머니의 분노에 티켓을 결국 취소했다가 자신의 연말 휴가를 포기할 수 없다며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탈 수 있는 스웨덴 항공권을 결제했고, Angela는 그 친구를 만나서 함께 여행을 하기 위해 헬싱키에 도착하는 즉시 스웨덴으로 갈 예정이라고 했다.

싱가포르도 친척 결혼식에서 친척들에게 시달리는 것은 똑같구나 하고 웃으며 실컷 여행하고 멋진 걸 예쁜 걸 많이 보고 많은 걸 경험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서로 많이 했다.



VR의 야간열차 침대칸은 정말 딱 둘이서 짐을 놓고 노닥거리기에 적합한 크기이고, 침대 옆 통로는 딱 한 사람이 지나기에 적합한 크기라서 정말 이 좁은 공간에 오밀조밀 이것저것을 다 갖춰놨구나 하고 놀랍기만 했다. 1층 침대 아래에는 짐을 넣어둘 여분의 공간이 있고, 창문 옆에는 간이 의자와 쓰레기통, 그리고 작은 테이블이 있다. 두 명이 대화를 하려면 한 명은 의자에 한 명은 침대에 앉아서 대화를 해야 했다.



화장실은 침대 맞은편 문을 열면 이렇게 세면대와 변기가 있고, 세면대가 있는 벽을 잡아당기면 안쪽을 샤워실로 쓸 수 있다. 달리는 열차에서 샤워가 얼마나 쾌적할까 싶지만 딱 한 사람이 서서 샤워하기에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물론 이 빈약한 공간에서 샤워를 하느니 나와 Angela는 수면을 더 취하는 것을 선택했다.



귀여운 부엉이 배게 옆엔 알람시계 & 콘센트 & 라디오 & 조명 & 수납함 역할을 하는 벽면이 있고



혹여 2층 사람이 자다가 떨어질까 봐, 2층에는 따로 안전벨트도 있다. 열차 바깥쪽을 향한 벽면에는 열선이 설치되어 있어 따뜻했는데, 나는 백팩을 그곳에 뒀다가 안에 넣어둔 초콜릿들이 다 녹아내린 것을 봐야 했다.



천장이 낮고 좁아서 집을 정리할 때는 여간 정신이 사나운 것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날 밤의 야간열차를 떠올리면 창 밖을 내다보면 까만 전나무 숲을 빠르게 지나치며 덜컹거리고, 차가운 공기가 객실 안을 떠돌고 있었고, 그 공기 속에서 우리는 조그만 캐러멜 상자에 갇힌 네모난 캐러멜처럼 달칵거리며 열차 안을 돌아다녔다. 옆 칸에 들릴까 소곤소곤 떠들며 웃었던 그 시간들이 기억이 난다. 온기가 부족해 몸을 뒤척였던 객차 안으로 어스름한 아침이 비치면 나는 겨우 눈을 뜨고 옆의 시계를 보고 다시 까무룩 잠이 들고 열차에서 내려야 할 시간을 걱정하는 여행객이 되어 조금만 더 이불속에 있었으면 하고 바라었다.



하지만 열차는 헬싱키에 정해진 시간에 도착했고 우리는 헤어지기 직전에 페이스북을 서로 친구 추가했다. 서로 같은 옷을 입고 사진을 찍었으며 서로의 남은 여행에 행운이 있기를 기원했다. 그래서 나는 오슬로에서 멋진 뭉크의 작품을 다시 만날 수 있었고 Angela는 결국 트롬쇠에서 오로라를 보았다.


Angela가 보내준 오로라 사진





야간열차는 숙소만큼이나 쾌적하진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경험을 원한다면 VR의 야간열차는 깨끗하고 제법 신식이라 불편하진 않을뿐더러 첫 야간열차 경험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가격은 대략 헬싱키 - 로바니에미 ( 끝에서 끝 ) 가격이 1인당 15만 원 - 20만 원 이내로 여러 옵션에 따라 변경이 있을 수 있고 티켓은 예약 2개월 전에 오픈된다.

더 자세한 열차 이용 안내는 아래 포스팅에 소개되어 있다.

북유럽을 이동하는 방법에 대하여 : https://brunch.co.kr/@nonay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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