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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노 Nov 12. 2016

기록된 과거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

코끼리열차, 니트릴 장갑, 화염 : 1986-2016



기록된 과거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

결국 내가 지금 쓰는 글도 마찬가지 이리라.


그렇다고 그게 의미가 없을까? 하고 묻는다면 아니지 않을까.

새로운 경험을 많이 많이 만드는 것만큼이나 쌓인 경험을 잘 풀어서 그 의미를 곰곰이 씹어보는 것도 또 다른 깨달음을 찾기 위한 방법일 수 있다.

나도 여행 후기를 쓰다 보면 그 당시에 몰랐던 사실들을 깨닫곤 한다.



10월 문화가 있는 날 과천 현대 미술관에서는 '코끼리열차, 니트릴 장갑, 화염 : 1986-2016'라는 특별 프로그램이 있었다. 큐레이터 데이를 참석하려고 갔다가 오늘만 이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마지막 남은 3시 30분 현장 참여를 예약했다. 사실 저기서 내가 제대로 이해한 부분은 코끼리 열차밖에 없을 것 같다.

실제로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어떤 프로그램일지에 대해 제대로 상상할 수가 없었다.

딱딱하고 무서운 느낌의 니트릴 장갑과 화염이 대체 어떻게 코끼리열차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대체 뭘 하는 거지? 코끼리 열차에 태우나? 그런 상상을 했다.

사실 코끼리 열차는 중학생 때 타보고 안 타 본 것 같은데, 그럼 내 인생 절반인 15년 전의 일이라는 걸 고려했을 때 유구한 옛날이다.



시간에 맞춰 도착하니 사람이 별로 없었다.

미리 준비된 것 같은 이어폰과 뷰 마스터를 받았다.

뷰 마스터는 교체형 슬라이드를 통해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장치이다.

과거 기술의 최전선이자 아날로그의 최전선이 아닐까 싶은 이 깜찍한 도구는 이 프로그램의 기획자인 사진작가 김익현과 독립큐레이터 이정민을 통해 과천 현대 미술관의 과거를 여행하게 하는 단서가 되어준다.



이어폰을 끼고 파워를 킨 타음 뷰 마스터를 들고 작가를 따라 다다익선 앞에 섰다.



이 프로그램은 원형 통로를 따라 올라가는 1부와 옥상 정원에서 정원을 빙글빙글 돌며 진행되는 2부로 크게 나뉘어 있다.

뷰 마스터를 통해 과천 현대 미술관의 역사와 과거를 돌이켜볼 수 있는데 여기서 프로그램 명인 코끼리열차, 니트릴 장갑, 화염은 셋 모두 과천 현대 미술관과 연관이 있는 키워드였다.

특히 코끼리 열차는 처음 개관하였을 때, 개관식 때 사람들이 타고 미술관을 왔던 추억의 상징이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 과천 현대 미술관을 추억해달라 요청을 받았을 때 코끼리 열차를 말하곤 했다고.



그리고 이제까지 주목하지 않았던 과천 현대 미술관의 대들보를 유심히 볼 수 있는 시간도 있었다.


우리 미술 발전에 길이 빛날 전당을 여기에 세우매 오늘 좋은 날을 가리어 대들보를 올리니 영원토록 발전하여라 천구백팔십오 년 십일월 십오일



짤막한 이야기가 끝나면 다시 빙글빙글 오르다 작가님은 이야기하고 우리는 뷰 마스터를 보고, 또 오르다 뷰 마스터를 보고 작가님은 이야기하는 상황이 반복되니 어쩐지 퍼포먼스에 참여한 관객처럼 흥겨워졌다.

이어폰과 뷰 마스터를 통해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보는지 전혀 알 수 없어 우리의 이동은 미술관 내에서 더욱 이질적이었다.



우리는 옥상 정원을 목전에 두고 두 번째 릴로 교체했다.


 


이야기보따리를 채워 넣는 것처럼 긴장되기도 하고 미리 이미지들을 보며 어떤 이야기일지 상상해보기도 하면서, 큐레이터 이정민 님의 진행이 시작되었다.



옥상 정원이 개방된지는 오래되지 않았다고 한다. 1부에서 과천 현대 미술관이 어떻게 세워졌는지 그 물리적 역사에 대해서 들었다면 2부에서는 과천 현대 미술관이 어떻게 외부의 것들을 포용해 들여왔는지를 들을 수 있었다.



저 멀리에는 리프트와 관악산이 보였다. 좋은 풍광에 눈이 즐겁다 했더니 미술관에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것 중 하나가 불이라는 것과 관악산의 화기가 미술관의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어 이 곳이 미술관에 있어 좋은 입지라는 설명을 듣고 나니 미술관이야 접근성이 좋고 건물이 전시하기에 훌륭하면 그만 아닌가 하는 내 짧은 생각과는 별개로 오래도록 사용될 건물을 짓는 일에는 그러한 고민까지 해야 하는구나 하는 놀라움마저 느껴졌다.



뷰 마스터는 빛이 있는 방향을 향해 사용하면 사진이 더 밝게 보여서 나도 모르게 광원을 찾게 된다. 일행들이 각자 다른 광원으로 사진을 보는 모습을 보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프로그램 마지막은 니트릴 장갑이었다.

니트릴 장갑은 요리를 하거나 실험을 하거나 수술을 할 때 사용되는 얇은 장갑의 이름인데 보통 손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는 장갑이 반대로 미술관에서는 미술 작품을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해 착용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고 한다. 미술관에서는 니트릴 장갑의 의미가 완벽하게 반대가 되는 것이다.

내부의 보호가 아닌, 외부를 보호하는 것으로 역전되는 장갑을 통해 미술관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니트릴 장갑의 사진을 마지막으로 과천 현대 미술관 옥상 정원에서 프로그램은 종료되었다.


공간의 이동과 과천 현대 미술관이라는 주제로 충실하게 짜인 내용, 그리고 뷰 마스터라는 도구를 통해 진행된 기대했던 것보다 즐거운 프로그램이었다.


어쩌면 토막토막 난 과거의 일부분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프로그램을 엮여 만났기에 더욱 흥미롭고 즐거운 시간이 아니었을까.

나의 과거도 후에 이런 이야기가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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