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엔 각자 집으로

헌법 개정 시 추가합시다

by etranger

나는 자연스러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내추럴-!


몸이 힘들고 불편한 건 견딜 수 있지만 마음이 어색하고 민망한 건 견딜 수가 없다.


어릴 때, 아빠 따라 (아빠가 모시던 외숙모인) 할머니 집에 가면 할머니와 엄마 아빠는 내가 생각하기엔 겉도는 무미건조한 대화를 하고, 나와 동생은 티브이 앞에서 지겨운 몇 시간의 사투를 벌였던 기억이 있다. 명절 때마다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명절엔 제사 준비하느라 엄마만 힘들었던 기억이 있고, 다른 사람 힘을 빌어 자신의 죽은 조상에게 최선을 다하면서도 살아있는 가족의 고생은 당연시하는 사람들의 위선적인 모습이 보기 싫어서 나는 명절을 극혐 한다. (물론 조상에게도 가족에게도 잘하고, 가족에게 더 잘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제사가 뭐라고.


결혼하고 나서는 추석 때 기차표 구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더욱 친정에 못 갔었고, 그나마 가까운 남편 부모님 댁도, 우리가 힘들고 바쁜데 쉬라고, 또는 어머님이 편찮으시다고 오지 말라고 하시는 때가 많아서 명절엔 한적한 서울을 즐기는 때도 많았다.


그래, 명절엔 서울이지!


아이가 생기고는 명절 당일 남편 부모님 댁 방문 후에, 그날 바로 다시 부산 우리 집으로 가기도 했는데, 남편은 남편 부모님만 뵈러 가는 게 미안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아니다 싶어 부산은 포기하기를 몇 년 째였다.


그러다, 몇 년 전에는 내가 외면해왔고 싫어하기는 해도, 엄마가 혼자 제사를 준비하면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에 명절에 우리 집에 가고 싶어서 남편에게 추석 때 각자 집으로 가자고 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남편이 우리 집에 가면 우리 부모님은 남편에게만 관심을 주어 나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다는 것. 뭐 그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서로 시댁, 장인 어른댁으로 가면 인사치레야 좋겠지만, 불편하고 어색하기만 하니(남편은 편하고 자연스러워 보이고 실제로 그렇다고도 말하지만) 마음 편하게 각자 집으로 가자는 것이 속마음이었다. 나는 엄마도 좀 도와드리고...


그러자 남편은 그러자고 하면서도, 부모님들이 또는 친지들이 우리 둘이 싸웠냐고 하겠다고 걱정했다.


So what?


나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거 같다고 했고, 그래서 그 해 추석에는 각자의 집으로 명절을 보내러 갔다.


남편과 싸웠냐고, 무슨 일이 있었냐고 걱정하실 거란 예상과 달리, 다른 사람들과 다른 행보를 보인 딸의 등장에 부모님은 조금 놀라시면도, 은근히 좋아하셨다.


그리고 아마 남편 부모님과 친척들도 어색하게 앉아있는 내가 없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테고, 내 눈치 보느라 남편에게 술을 권하기를 삼가 지도 않았을 것이며, 남편도 온전히 아들, 조카, 시촌 오빠/형으로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남편은 또 그랬다. 친지들이 딸이랑 나를 보고 싶다고 했다고.


Again, so what?


이라 생각하고, "네네-" 했다. 보고 싶다고 한다고 보여줘야 하나? 나는 아닌데, 나는 어색하고 싫은데.


가족 간 화목한 것도 좋고, 명절 때 친지들 모여 화기애애한 것도 좋다. 하지만 나는 어색한 게 싫고 내 얼굴 보고 싶다고 한마디 하는 것에 나의 시간을 내어주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도 안다. 사람들은 또는 사회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으레 하는 것들에 대하여 내가 얼마나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딴지를 걸고, 거부하고, 거기에 내 의견을 내세우고, 할 말을 하고 사는 편인가를.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나는 이것도 안다. 내가 얼마나 남편과 아이를 위해 내 취향과 의사를 포기하면서 살고, 그들의 안녕과 평안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 어느 것도 잘하지 못하지만, 최선을 다해 일과 육아, 살림을 병행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가를. 얼마나 (나름) 희생하는 가를.


끝으로 나는 안다. 내가 명절 때 만이라도 하고 싶은 거 하고, 편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엄마 아빠와 온전히 시간을 지내고 싶다는 것이, 절대로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족으로서 나를 좋아해 주시고, 그래서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남편의 부모님과 친척들께는 매우 감사하지만, 부모님과도 노력 없이는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게 힘든 나로서는, 확장된 가족이나 친척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매우 어색하고 어렵다.


남편은 가족, 친척은 물론이고 친구들, 많은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고, 그런 시간을 오히려 주도해서 만드는 편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점이 정말 자연스럽게 되지 않는다.


이렇게 다른데도 불구하고 내가 남편을 존경하는 이유는, 내가 남편이 하자는 데로 곧이곧대로 하지 않고, 항상 이유를 달고, 거절 먼저 하고,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고, 그래서 "이 여자는 정말 한 번을 '네'하는 적이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런 내 모습까지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용해주기 때문이다.


그 해 추석을 따로 보낸 이후, 그렇게 따로 명절을 보낸 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다, 내가 이번 추석 때, 설에 혼자 부산에 가겠다고 하면, 남편은 흔쾌히 그러라고 할 것이라는 것을.


그렇지만, 명절에는 각자 집으로 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은 든다.


헌법에 포함되어도 어려운 일이겠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가 헌법에 규정되어있어도 실제로는 매우 어려운 일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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