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좋은 회사이길래
나는 제조업계에서 10년 동안 일해왔었다. 최근에는 '제조업은 끝났다'거나 'IT가 대세다'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지만, 내가 느낀 바로는 제조업, 흔히 말하는 굴뚝산업은 역동적이고, 다양한 업무가 있고, 그래서 일이 재밌다. 그리고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제조업은 계속될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내가 제조업이 재미있다고 생각한 이유는, 가운데 몇 개월 동안 IT/통신을 주요 사업으로 하는 회사에 다녀봐서인데, 이 회사는 서비스업 위주라 사업의 범위가 좁아 재미가 없었고 (물론 계속 개발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회사는 다를 것이다), 다시 구매, 생산, 연구개발, 유통, 마케팅, 판매, 기획 등 다양한 업무가 있는 제조업으로 옮기고서는 깨달았다.
"역시, 제조업이야."
하지만, 제조업 회사를 다니면서, 아니 제조업이 아닌 회사를 다니면서도 느낀 점은, 회사가 너무 덩치가 크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이었는데 비리, 성추행, 폭언, 심지어 폭력, 차별, 괴롭힘 등 피해를 당하는 입장에서는 괴롭고 힘든 문제들이었다. 특히, 나는 비윤리적이거나 비상식적이라 생각되는 행위에 동참할 생각이 없어, 아웃사이더로 내 일만 하면서 회사생활을 해왔지만, 보고 참기 어려운 일들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싸우기도 하고, 그럴 수 없을 땐 이직을 선택했다.
지난해까지 총 4개의 회사에 다녀보았고 (사무실 포함하면 6개), 그래서 동료들에게 해 줄 수 있었던 말은 '회사는 어디나 다 비슷하다'였다. 어디든 꼰대가 있고, 갑질이 있으며, 어느 회사든 직원을 딱히 생각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회사는 이익을 추구하는 곳이니 그런가... 하다가도, '사람'이 없으면 회사가 존재할 수가 없는데 '사람'들이 기계 부품처럼 취급받는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너무하다 싶었고, 그러면서 회사는 정말 다 비슷할까...라는 의문이 생기게 되었다.
"좋은 회사는 없을까?"
회사에 대한 평점을 해당 회사의 직원들이 주는 사이트에서 특히나 평점이 좋은 회사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 회사에서 공고가 났길래 지원을 해보았다. 감사하게도 채용이 결정되어 오퍼를 받았는데, 이전 회사에서 나는 일을 재밌게 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익숙한 일들을 뒤로하고, 특히나 업계가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맞는지 고민이 되었다. 너무 고민이 되어 잠도 며칠 거의 못 잤다. 그래서, 일단 잠을 못 자는 적이 없는 내가 잠을 못 잘 정도면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이고, 안 가보면 궁금증이 안 풀릴 거 같아서, 후회할 수도 있겠지만 고민을 백만 번 하고 잠을 못 자는 것보다는 후회하는 편이 더 나을 거 같아서 또 한 번 이직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2개의 중견기업, 2개의 대기업을 거쳐, 5번째 회사에 다닌 지 3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 심지어 수습딱지도 못 뗀 주제에 초기 판단으로 스스로 가진 질문들에 대해 답변하자면,
"회사가 다 비슷하지는 않구나."
"좋은 회사도 있을 수 있구나."
막연하게 "좋은 회사"를 바라 왔으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떤 회사가 좋은 회사냐고 물으면 대답이 막혔을 것이다. 또, "좋은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에 대한 생각도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다.
나는 지금 회사에 다니면서, 좋은 문화를 가진 회사와 직원들의 필요를 생각한 복지가 갖춰진 곳이 좋은 회사의 요건의 일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회사는 제조업이 아니라 IT/엔터테인먼트 대기업이다. 처음에는 전화가 아닌 슬랙이나 이메일로 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환경에 적응을 못하였고, 내 일과 관련된 이메일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는데도 하루에 백개가 넘는 이메일 공세에 당황했으며, 사람들이 너무 친절하게 이메일을 써서 '왜 이렇게 가식적이지'라고 생각했었다(삐뚤어진 나란 사람...). 일을 하나 할 때에도 일 자체는 어려운 것이 아닌데, 담당자에게 직접 연락해서 되는 일보다는 이메일이나 시스템상 등록을 통해 절차를 거쳐야 해서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이 답답하기도 했다.
그러나 처음에 정신없던 몇 주를 겪고 찬찬히 지켜보니, 사람들이 가식이 아니라 정말 친절하고, 한 가지 일을 하기 위해서 여러 사람이 의견을 공유하고 유연하게 커뮤니케이션을 하느라 조금 시간이 걸리는 것이며, 여러 사람의 협업이 필요한 경우에는 작은 프로젝트라도 참여자 모두가 굉장히 적극적인 자세로 참여하였다. 절차가 복잡한 것은, 절차라 쓰고 윗사람 마음대로라 읽혔던 과거 회사들에 비추어보면, 직책이나 직급에 관계없이 지켜야 하는 시스템이 존재하고 준수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한 것이었다.
또한 복지는 어떠한가? 많은 복지가 있지만, 그중 내가 가장 좋다고 느끼는 복지는, 바로바로 커피! 회사에서 최고 언니였던지라 밥도 커피도 (당연히 내가 원해서 기꺼이) '내돈내산'으로 쏘아온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는 직원이 사내 카페에서 쓸 수 있도록 일정액을 주는데, 이것만 보아도 직장인에게 커피가 얼마나 중요하고 coffee break가 필요한지를 잘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사내 어린이집 아가들이 노란 비옷과 모자를 쓰고 쪼로로 서서 회사 잔디에 물을 주고 있는 모습을 보니, 힘겹게 육아했던 기억들이 겹쳐지면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내가 이런 회사에 다녔다면 그렇게 딸과 떨어져 살거나 발을 동동 굴려야 하는 시간들이 줄지 않았을까... 딸한테도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미안함이 밀려왔다. 출퇴근 시간도 자유로워 함께 출근해서 자녀는 등원시켜주고, 업무 하다가 자녀와 함께 퇴근하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자녀와 등원하는 부모에게는 사옥의 주차도 우선적으로 주어진다.
게다가 아직 오래 다니지 못하여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상하게 꼰대가 없는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그럴리가 없는데... 직급의 높다는 이유로 시키지 말아야 할 일을 시키거나, 자신의 사고방식을 강요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꼰대를 아직까지는 보지 못했다. 누가 꼰대라고 말하는 것도 들어본 적이 아직까지는 없다. 어떤 이슈가 있으면, 이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는 편이지 누구의 생각이나 의도를 강요하는 분위기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누구 하나 나서서 딱 결정해주면 빠를 텐데, 책임을 안 지려고 그러나...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여러 의견이 교환되고, 조율되는 과정이 수평적이고 민주적으로 보이기에 조금 멋진 것도 같다.
쓰다 보니, 입사한 지 얼마 안 되는 회사 칭찬이 되어버렸다. 좋다/아니다, 나랑 맞다/맞지 않다는 종류의 판단은 개인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므로, 같은 회사에 다니더라도 만족도는 다 다를 것이다. 또 전반적으로 회사에 만족하면서도 불만 있거나 개선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나도 더 오래 다니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이런 좋은 회사의 면모를 갖춘 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것이 얼떨떨하면서도 감사하다.
안정성을 매우 지향하는 나라는 사람이, 궁금하다는 이유로 이직을 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또한 익숙한 일을 제쳐두고, 10년 동안 일하던 업계를 떠나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큰 도전이었다. 그런데 올해 나이의 앞자리가 바뀐 것이 쓸데없는 용기를 준 것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사는 인생 해보고 싶은 것도 한 번 해보고, 궁금하면 또 한 번 경험해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그러다 후회할 가능성이 분명히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걸어가는 모든 과정에서 깨닫고 얻는 가르침이 있을 터이니 그 또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