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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ranger Aug 05. 2021

저 술 못 마시는데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또 한 번 제조업계로 이직을 했었을 때다.


군대문화로 이름을 날리는 H그룹사 중 하나인 S사로 이직을 한다고 하니, 주변에서는 100이면 100, 나와 H그룹사 문화는 안 맞을 것이라고 했었다.


입사 첫날, ice breaking을 하시려는 건지 우리 부서 이사님께서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나와 동료 J를 불러서 티타임을 가졌는데, 그 자리에서 가장 처음 이사님의 질문은, "술은 좀 하나?"였다.


나의 동료 J는 본인이 술을 좀 마시고, 술자리도 좋아한다고 먼저 밝힌 상황에서, 나는 꿋꿋하게 말했다.


"저 술 못 마시는데요."


당시 이사님의 동공이 약간 흔들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 한 잔도 못하나?" 하시길래, "네"로 응수하자, 분위기가 갑자기 어색해졌다. 이사님은 잠시 다음 할 말을 찾으시더니, 약간 심드렁하게 우리 부서는 술 강요하고 그런 분위기는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아마, 입사 첫날이면, 못하는 것도 잘한다고 하는 게 보통인데, 나는 매우 당당하게 못한다고 말해서 처음부터 '좀 특이한(또는 이상한) 애'로 찍힌 것 같다.


이후, J와 나의 회사생활이 매우 달랐음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J는 나보다 나이는 적지만 초등학교 고학년 아들이 있었고,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딸이 있는, 우리는 워킹맘 입사동기로 비슷한 처지에 있었는데, J는 저녁에 회식자리에 많이 불려 나가서 힘들어했고, 나는 매번 회식 참석 멤버 고려대상에서 제외되어 S사에 재직했던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회식은 2번 정도 한 거 같다. 그때도 나는 물을 술잔에 담아 짠.


이사님, 상무님, 본부장님, 그 다른 어떤 누구라도 나에게 술을 권하면서 잔을 갖다 대라고 하면, 나는 웃으면서 물통을 가져와 건네 드린다.


"저는 물로 따라주십시오."


그러면 쿨하게 보이고 싶고, 요즈음 세대를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어른들도, "아, 요즈음은 술을 강요하지 않지" 하면서, 기꺼이 물을 따라준다. You are so cool!


사실 회식은 팀워크를 도모하기 위한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지만, 매번 원하지 않는 회식에 끌려가서 내 시간이 낭비되는 것은 나로서는 매우 견디기 힘든 일이다.


물론 술을 잘 마시지는 못하고, 몸에서 이상반응이 나타나기는 하나, 가족과 친구들끼리 한잔씩 하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회사 동료들에게도 못 마시는 코스프레하기 약간은 미안했고, 맛있는 맥주 런던 프라이드의 본고장인 영국에 출장 가서도 무알콜 맥주를 마실 수밖에 없었던 뼈아픈 이야기도 있지만, 나는 집에 일찍 돌아와 아이와 남편과 되도록이면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가능하면 저녁에도 차분히 내 시간을 조금이라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알쓰(알코올 쓰레기) 연기 정도는 기꺼이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가는 회식이 아닌, 동료들끼리 단합을 친목을 도모하고 즐거운 시간을 가지기 위하여, 서로 의논해서 좋고 예쁘고 힙한 곳을 찾아 예약하고, 파티 콘셉트를 준비하고, 각종 준비물도 바리바리 싸들고 가서, 맛있는 거 먹으면서 크리스마스 파티, 브라이덜 샤워, 뉴 멤버 입사 축하, 퇴사 기념, 여름맞이 등을 기념하며 상사 없이 우리만의 추억을 남기기도 하였다.


회식을 안 한다고 하면, 회사에서 관계가 중요한데, 그럼 대인관계는 어떻게 되는 거냐, 평가는 어떻게 되는 거냐 걱정할 수 있겠다. 과거에는, 아니 현재에도 회식에 잘 따라와서 상사 비위를 맞춰주는 사람이 업무능력과 상관없이 평가를 잘 받고, 승진도 하는 케이스가 있기는 하다.


대인관계가 회식으로 형성되고 돈독해지는 경우도 물론 있겠지만, 업무 하면서, 미팅하고 전화하고 이메일로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면서도 회식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회식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으므로) 좋은 대인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고 늘려갈 수 있다.


이건 내가 경험한 일인데, 내 일 열심히 하고, 내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도움을 줄까도 고민하면서 적극적인 자세로 업무 하고, 그 과정에서 진정한 태도로 다른 사람을 대했을 때, 업무에서도 관계에서도 시너지 효과가 났었다. (그래서 업무평가에서는 팀 내 최고 점수를 받은 결과로도 이어졌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과감히 "No"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이 약해서, 상황 때문에, 눈치를 보아하니... 등등의 이유로, "No"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면, 그때에는 그 상황에서 잘 빠져나오고 눈치껏 행동한 것이기는 하겠으나, 나의 생활은 원하지 않는 것들로 채워지게 될 것이다.


잠시 상대를 갸우뚱하게 하고, 매우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흐를 수도 있겠지만, 과감하게 그러나 상냥하게 "No" 한다면, 장기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 중요하다고 믿는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고, 하기 싫은 것은 덜 하게 되는 삶을 살 수 있다.


내 삶은 누가 살아주는 것도 아니고, 두 번의 기회가 있는 것도 아니므로, 나는 모두가 "Yes" 할 때, "No"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반대로 모두가 "No"할 때는 나는 "Yes"를 외치곤 한다.


"술 좀 하나?"


"아니오. 저는 술을 못 마십니다."


"한잔도 못하나?"


"네."


이 잠깐의 대화가 나를 매일 다섯 시 반이면 집에 도착해 있는 삶을, 카페에서 쉬고 갈 때면 6시에 집에 도착해 있는 삶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시간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쓰고 싶을 때, 시간의 주도권을 가져오고 싶을 때는, 당당하면서도 예의바르게 "아니오"라고 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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