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 (Late Autumn, 2011)

김태용의 <만추>를 보고

by sunjoo

1. 왜 이 사람의 포크를 썼나요. 왜?

훈과 왕징의 몸싸움이 시작되고, 무슨 일이냐 묻는 애나에게 훈은 대답한다. “이 사람이 내 포크를 썼어요. 그런데 사과도 안 하잖아요. 이래도 되는 거예요?” 가만히 듣고 있던 애나는 훈보다 더 격해진 감정과 함께 왕징에게 말한다. “왜 이 사람 포크를 썼어요? 말해봐요. 왜 이 사람 포크를 썼냐고요? 사과했어야죠. 설사 모르고 그랬더라도. 안 그래요? 왜 그랬어요? 대답해 봐요!” 애나는 절규와 함께 소리내어 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왕징, “미안해...” 라며 사과한다. 7년 간 애나의 온몸을 짓누르고 있던 포크가 드디어 빠져나간다.



2. 안개

"주위를 보세요. 오늘따라 날씨가 아주 좋네요. 이맘때 시애틀은 늘 안개가 많고 비가 오는데... 보세요. 지금은 해가 났네요. 여러분들이 햇살을 가져왔나 봐요. 햇빛을 즐기세요. 안개가 다시 끼기 전에."

애나에겐 늘 안개와 비가 함께 한다. 애나와 훈이 처음 버스에서 만났던 그때에도, 7년 만에 자신의 동네를 다시 걷게 되었던 그때에도. 안개는 늘 애나의 곁을 맴돌며 애나의 시야를 흐릿하게 만든다. 애나는 7년 전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안개 속에 갇혀있다.



3. 여기서 벌어진 일은 여기에 두고 간다

영화 속에서 처음으로 안개가 걷힌 건 애나가 훈과 함께하는 순간이다. 시애틀의 관광 오리 버스에 올라탄 두 사람. 보트의 운전사는 이렇게 말한다. "딱 한 가지만 기억하세요. 서로 다시 만날 일은 없으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여기 오리버스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여기 오리버스 안에 두고 간다!"

7년 전. 애나는 피범벅이 된 채로 주택가를 걷는다. 그러다 자신의 집이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애나. 두어 번 고민하다 이내 집을 향해 달린다. 애나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남편의 시체를 바라본다. 그리곤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왕징과 자신의 모습이 담겨져 있는 사진을 질겅 씹어먹는다. 7년 후, 사진을 씹어먹던 그 입을 양치 중인 애나. 앉은 채로 이쪽을 바라본다. 애나의 오리버스 안에는 처음부터 나갈 수 있는 문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4. 훈의 시계

"저한텐 굉장히 중요한 거거든요. 돈 갚을 때까지 그 쪽이 가지고 있어요. 잃어버리면 안돼요."

훈은 모자란 버스비를 애나에게 빌리고, 그 대가로 자신이 아끼는 시계를 건넨다. 애나는 이를 거절하지만, 훈은 자신의 시계를 직접 애나의 손목에 채워 주기까지 하는데.

며칠 뒤, 훈으로부터 돈을 돌려받은 애나는 시계를 돌려 준다. 그러나 훈의 시계는 마지막 순간에 다시금 애나에게 돌아온다. 훈과 함께 마실 커피를 들고 애타게 그를 찾던 애나는, 자신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 훈의 시계를 발견한다. 늘 애나의 시야를 가리던 안개가 걷혀가고, 경찰차의 사이렌이 울린다. 얼어붙었던 애나의 시간이 다시금 흘러가기 시작하는 순간, 순탄하게 흘러갔던 훈의 시간은 매섭게도 얼어붙는다.


​탕웨이만의 쓸쓸하면서도 강렬한 눈빛은 영화의 안쪽 세계와 바깥쪽 세계를 단번에 연결시킨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시애틀을 온몸으로 경험하는 느낌이었다.

가끔 너무 좋은 영화를 보면 그 영화가 남기고 간 발자국 위에 내 발자국을 꾸욱 눌러 남기고 싶단 생각이 든다. 쌀쌀한 낮의 안개 낀 시애틀의 모습은 어떨까? 그 모습이 어떻든 만추와 함께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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