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령 공주 (The Princess Mononoke)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노노케 히메>를 보고

by sunjoo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개봉 기념으로 지브리 영화들을 다시금 하나하나 꺼내보고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지브리 영화 네 편을 뽑아보자면 천공의 성 라퓨타, 원령공주,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되겠다. (이렇게 보니 나는 무거운 분위기나 위압감이 느껴지는 소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작품들을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원령공주를 처음 봤을 땐 신체 부위가 잘려나가는 모습이나 짐승들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무서워 악몽을 꾸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이런 적나라함과 사실적인 묘사가 지브리만이 가진 강점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인간은 짐승 중 유일하게 이성을 지녔으며 이에 잇는 높은 지능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인간이라는 종족을 다른 짐승들과 분리하며, 자연에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개체로 여기고는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할 수 없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자연으로부터 발생하며, 자연으로부터 운명을 맞이한다. 예상치 못한 자연재해로 인해 죽음을 부여받기도 하고, 운명인지 우연인지 알 수 없는 자연의 섭리로 죽음의 문턱 앞에서 다시 한 번 삶을 부여받기도 한다. 숲의 신인 시시신이 재앙신으로 변해버린 나고신의 생명력을 빼앗아가고, 죽어가던 아시타카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 것처럼 말이다.


시시신은 자연을 해치고 파괴하려는 종족인 인간 아시타카에게 생명력을 불어 넣었지만, 정작 숲을 수호하는 나고신에게선 생명력을 빼앗아갔다. 명색이 숲의 신이라는 자가, 어떻게 숲을 수호하는 자들을 외면할 수 있는가. 작중 나고신과 옷코토누시를 따르던 멧돼지 동족들 역시 이러한 시시신의 행동에 반발심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정말 시시신이 그들을 외면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선의 대상에게는 구원과 자비를, 악의 대상에게는 벌과 심판을 내리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신의 이상적인 이미지일 테지만, 이 신이라는 단어 앞에 ‘숲의’ 라는 단 하나의 수식어만 붙게 된다면 그것의 의미는 완전하게 달라지게 될 것이다.


정해진 법과 규율 내에서 도덕적 관념을 유지해야 하는 사회와 달리 자연에는 선악의 구분이나 이분법적 도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계속해서 굴러가는 ‘순환’의 법칙을 물 흐르듯 흘러가며 따를 뿐. 시시신은 자연이 정해 준 자연의 규칙 내에서 본인의 임무를 수행한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나고신이 본인의 운명을 직면할 수 있게, 그가 자연의 품으로 온전히 돌아갈 수 있게.

그렇다면 시시신은 왜 아시타카에겐 생명력을 부여하였는가? 나는 이 질문에 개인적인 두 가지의 의견을 표출하고 싶은데, 첫째는 나고신과 아시타카가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에 처해있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거다.

숲을 파괴하려는 인간들에 대한 원한과 끝내 숲을 지켜내지 못하였던 삶에 대한 미련으로 재앙신이 되어버린 나고신은 결국 산을 타고 내려와 동쪽 마을까지 습격하게 된다. 아시타카는 나고신을 처치하게 되는 순간 자신에게 큰 재앙과 저주가 닥쳐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모두 수용하기로 결심하여 나고신을 죽이고 위험으로부터 마을을 구해낸다. 죽음을 마주하지 못한 나고신과 달리, 아시타카는 본인에게 다가올 운명을 수용한 것이다.


둘째는, 그냥 아시타카가 그때 죽을 운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실 아시타카가 아니었다면, 죽었어야 하는 건 산의 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시타카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상황은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을까.

시시신은 아시타카에게 생명력을 선사하기 전 산이 꽂아놓은 나뭇가지로부터 생명력을 빼앗아간다. 이는 자연의 굴레 안에서 탄생과 죽음이 가지는 순환의 법칙, 그리고 이것이 가진 위엄성을 나타낸다. 생명력을 얻기 위해선 생명력이 필요한, 이 과정이 온전하게 성립되는 것이다.

​ 작중 아시타카는 인간으로서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캐릭터이다. 기술의 발전이 가진 중요성을 인지하면서도 자연을 수호하고 보존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아시타카는 (이를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야쿠르라고 생각한다. 사슴을 가축 그 이상 그 이하로도 보지 않는 인간들과 달리 야쿠르를 진심으로 본인의 동료로 인지하고 있다.)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가장 중립적인 캐릭터로, 누구보다 '공존'을 잘 이해하고 있다.

오랜만에 다시 본 영화인데, 이전보다 더 다양한 관점으로 영화를 바라볼 수 있어 좋았던 것 같다. 언젠가 지브리도 역사의 끝을 맞이하겠지? 그 순간이 최대한 천천히 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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